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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3월호

음악평론가 송현민의 석관동 캠퍼스의 추억정치 공작의 중심에 들어선 예술학교
과거 중앙정보부가 사용했던 건물에 들어선 한국예술종합학교. 그곳에서 대학 시절을 보내며 청춘의 꿈을 키웠던 필자는 누추한 골목과 소박한 술집이 존재했던 그 시절의 석관동을 떠올린다. 이제는 의릉에 묻혀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캠퍼스의 흥미로운 뒷이야기를 오랜만에 꺼내들었다.

서울 단상 관련 이미지

1998년 겨울,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신이문역에 내린 나는 택시에 올라탔다.
“아저씨. 옛 중앙정보부 자리로 가주세요.”
“아니! 학생이 거긴 왜?”
“예술학교가 거기에 있다는데요.”
내가 말한 곳은 한국예술종합학교였다. 학교는 조선의 경종(1688~ 1724)과 그의 계비(임금이 다시 장가를 가서 맞은 아내) 선의왕후 어씨(1705~1730)가 묻혀 있다는 의릉 바로 옆에 있었다. 택시기사는 가는 동안 놀란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며 “예전엔 여기 무서운 곳이었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중앙정보부 후보지를 놓고 고심 끝에 석관동에 위치한 의릉을 낙점했다고 한다. 5·16 쿠데타 직후 구황실재산사무총국으로부터 의릉 능역 전체를 접수했으며, 1962년 1월부터 무상으로 임대해 사용했다. 왕릉 중에서 중앙정보부 청사 자리를 고르라고 조언한 이가 박정희라는 설도 있으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둘 중 누구 아이디어였든 간에, 수십 년 동안 나라를 쥐락펴락할 정치 공작의 중심지로 왕릉을 선택한 것은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간다’는 정보장교 출신들다운 절묘한 발상이었다.

캠퍼스에 얽힌 무성한 소문들

어느덧 이 학교 학생이 된 나는 학교를, 아니 과거 중앙정보부 건물을 드나들었다. 입학과 함께 연일 이어지는 술자리에선 학교 터에 관한 소문이 늘 안줏거리였다. 신입생들이 “건물은 작은데 강의실을 찾기가 너무 힘들다” “한 번 길을 잃으면 계속 헤매게 된다”고 말하면 선배는 “중앙정보부 건물이었기 때문에 옆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게끔 설계되었다”고 했다. 실제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강의실로 가는 지도를 나눠주기도 했다.
별의별 이야기가 다 돌았다. 영상원의 편집실은 지하에 위치했는데, 지하는 원래 십 몇 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4층도 안 되는 지상 건물은 이를 숨기기 위한 것이라는 이야기, 이 건물에서 죽은 원혼들이 간혹 밤마다 찾아온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따뜻한 봄이 와도 건물 내부는 추웠는데, 음기가 많이 서려 있기 때문이라는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국악을 주종목으로 가르치는 전통예술원에는 연희과가 있었다. 농악, 풍물, 굿을 전공으로 하는 과였다. 전통예술원을 원래 음악원과 무용원이 있는 서초동 캠퍼스에 설립하려고 했는데, 영혼들을 달래고, 잡귀를 누르고자 석관동 캠퍼스에 설치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학교 옆의 의릉도 이런 소문에 일조를 하곤 했다. 학교 정문으로 가기 위해선 의릉을 둘러싼 철망 옆으로 난 길을 걸어야 했다. 그 철망 너머로 보이는 의릉은 늘 단아한 잔디로 덮여 있었고, 인근 유치원생들의 소풍 장소로 즐겨 사용됐다.
어느 날 연희과에서 만신, 즉 큰무당을 초빙하여 특강을 하기로 했단다. 학교를 찾은 만신이 자신을 안내하던 학생에게 “여기 귀신들은 좀 독특하게 생겼네. 학생 이 근처에 뭐가 있나?”라는 질문을 던졌고, 학생이 “의릉이 있는···데···요”라고 답하자 “아! 그래서 귀신들이 좀 독특하구나”라고 했단다. 이야기를 듣던 우리는 술잔을 손에 든 채 부들부들 떨었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공간

학교 인근은 정말 한적했다. 낡고 낮은 지붕의 주택들이 빽빽이 형성되어 골목을 만들었고, 그 사이로 학생들이 지나다녔다. ‘서울 같지 않은 서울’이었다. 학생들의 라이프스타일 또한 어느새 이러한 석관동의 풍경과 시간에 맞춰지곤 했다. 낮에는 강의실에서 전 세계 예술의 흐름과 트렌드에 대해 배우고 논했으며, 저녁에는 석관동 골목마다 들어선 누추하고 작은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중앙정보부 시절,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심은 높다란 나무가 있는 정문 근처는 주민들을 위한 공원이 되었고, 야간작업과 실기에 지친 학생들의 옷차림도 주민들의 운동복 차림을 닮아가기 일쑤였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오래된 가정집을 개조하여 조촐한 한정식을 선보이는 음식점도 있었는데, 한쪽 방에는 중앙정보부에 시찰 차 들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긴 작은 서예도 걸려 있었다. 그곳은 학생식당을 벗어나 ‘외식’을 할 때 가는 곳이었다. 가격은 불과 몇 천 원 차이였지만.
중앙정보부는 1995년 국가정보원이 내곡동 신청사로 이전하기까지 30여 년 동안 의릉 경역을 유린하고 훼손했다고 한다. 2006년 바로 옆에 번듯한 교사가 들어서자 학교는 그곳으로 이전했고, 의릉을 관리하던 문화재청은 중앙정보부 건물을 헐고 그 터를 의릉 부지로 복원시켰다. 다만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중앙정보부 강당은 2004년 등록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어 그 주위에 남아 있다. 한때 청춘을 보낸 캠퍼스는 기억과 소문으로만 존재하고, 그 터는 의릉에 묻혀버렸다.
음기가 센 곳에서 예술이 꽃핀다고 했던가. 악명 높은 감옥이 있던 터에 들어선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처럼, 중앙정보부 건물에서 동문수학했던 이들이 모이면 간혹 “우리도 한때 음기 먹으며 예술 했던 학번 아닌가”라며 서로들 웃곤 한다.

글 송현민_ 음악 듣고 글 쓰며 부지런히 객석과 책상을 오가는 음악평론가. 급변하는 음악 생태계에 관한 충실한 ‘기록’이 곧 미래를 ‘기획’하는 자료가 된다는 믿음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림 신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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