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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월호

‘용도’ 강박을 버리면 드러나는 공간의 가능성 방치된 노들섬이 더 아름답다
한강을 따라 차를 타고 가면 크고 작은 섬들이 눈길을 잡는다. 하나하나 우리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풍류객들이 찾던 봉우리에서 채석장으로, 다시 정수장에서 공원으로 탈바꿈한 선유도, 너무나 척박한 벌판이라 ‘너나 가져라’라는 뜻이었던 여의도는 거대한 빌딩 숲으로 변했고, 조선시대 조선업 마을이 있던 밤섬은 여의도를 만들기 위해 폭파되어 사라졌다가 한강의 퇴적작용에 의해 철새들의 섬으로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섬이 있다. 바로 노들섬이다. 원래 이름이 중지도(中之島)인 이곳은, 1995년에 일본식 이름을 한글로 바꾸면서 노들섬이 되었다. ‘노들’은 ‘백로가 노닐던 징검돌’이라는 뜻으로, 용산 건너편 지금의 노량진 부근을 이르는 말이었다. 지금은 거대한 콘크리트 옹벽에 둘러싸여 마치 중세 성곽 같은 느낌이지만, 원래는 용산구 이촌동 쪽과 연결된 거대한 백사장의 작은 모래언덕이었다. 갈수기에는 여의도보다 더 큰 규모의 모래밭이 갈대로 가득했고, 갈대숲 위로 지는 석양이 아름다워 용산8경 중 하나로 불리기도 했다.

서울 건축 읽기 관련 이미지1 텃밭과 마을이 들어선 지금의 노들섬 모습(촬영: 이소푸디자인).

서울 시민이 사랑했던 ‘노들’의 개발과 퇴화

하지만 아름다운 작은 모래언덕의 운명은 1917년 일제가 이곳을 지나는 인도교를 세우면서부터 바뀌게 된다. 1900년 한강 최초의 다리인 한강철교를 세우면서, 차량과 사람이 건너는 다리도 필요하게 되었고, 공사가 용이한 모래언덕에 석축을 둘러 인공 섬을 만들고, 그 위에 한강 북단 이촌동 쪽과 남단 노량진을 잇는 두 개의 다리를 이어 인도교(현 한강대교)를 세웠다. 일제는 인공 섬을 ‘물 가운데 있는 섬’이라는 뜻의 ‘중지도’라 불렀는데, 이때부터 하나의 섬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던 시절에 걸어서 한강을 건너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었고,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노들섬은 자연스럽게 유원지로 사랑받게 되었다. 지금도 둥그렇게 둘러선 당시 석축의 일부가 섬 북쪽에 남아 있다.
광복 후 노들섬은 서울시민의 대표적인 문화사회적 공간으로 사랑받는다. 주변 모래밭은 ‘한강 백사장’이라 불리면서, 여름에는 피서지로,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 변하는가 하면, 대통령 선거 유세장으로도 활용되기도 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표어로 유명한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1894~1956) 선생의 선거 유세를 보기 위해 1956년 5월 3일 30만이 백사장에 운집하기도 했다. 하지만 1968년부터 시작된 한강개발계획을 위해 모래를 퍼내기 시작하면서, 아름다운 백사장은 사라졌다. 그나마 남아 있던 모래밭은 1973년 콘크리트 옹벽을 둘러 노들섬을 매립 확장하면서 모두 사라져버렸다. 한강과 분리된 노들섬은, 개발에 참여한 민간 기업에 넘겨지면서 우리의 삶에서도 거의 사라졌다.
노들섬이 다시 우리의 삶으로 돌아온 것은, 2005년 서울시가 섬을 매입하면서 이곳에 거대한 오페라하우스를 짓겠다고 발표하면서부터다. 하지만 국제설계공모에서 당선된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Jean Nouvel, 1945~)의 작품은 설계비 문제로 무효가 됐고, 다시 오페라하우스의 입지와 교통 문제, 환경 파괴 등 여론의 반발을 감안해 복합예술공간으로 변경된 건축가 박승홍(DMP)의 두 번째 안은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농작물을 키우는 ‘노들텃밭’이 들어섰다. 그리고 이제 그곳에 시민공모와 국제현상설계공모전을 통해 ‘노들마을’이 들어선다고 한다. ‘실내·외 공연장과 공원, 상점가 그리고 생태교육시설 등을 산책로와 골목길로 연결해 하나의 작은 마을’을 만들 것이라고.

서울 건축 읽기 관련 이미지2 노들섬은 특별한 용도나 기능으로 재단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곳이다.

자본이나 가치로 환원되는 ‘용도’에 대한 강박

노들섬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마치 용도에 안달이 난 것 같다. 1917년 일제에 의해 다리의 교각으로 시작해 1968년부터는 한강 개발을 위한 채석장으로, 1973년부터 ‘대지’로, 2005년부터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그리고 다시 마을까지…. 시대마다 가치관은 변했지만 노들섬을 효용성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들에게 노들섬은 그저 방치된 공간일 뿐이다. 문화예술이든 마을이든, 개발이든 보존이든, 특정한 기능이나 자본의 가치로 환원할 수 없는 ‘용도’는 이들에게 용납될 수 없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광기(狂氣)의 역사(Madness and Civilization)>(1961)에 의하면, 이성적인 잣대로 재단될 수 없는 ‘광기’가 사회에서 추방되기 시작한 것은 17~18세기부터라고 한다. 근대국가의 탄생과 함께, 중세까지만 해도 그나름대로 경외의 대상이던 ‘미치광이’들이 모두 수용소로 보내지게 된다. 심지어 부랑자, 거지, 실업자 등도 닥치는 대로 대낮에 수용소로 보내졌다. 정신이상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근대국가의 규범에 맞지 않는 존재는 모두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삼청교육대가 그런 곳 중 하나였다. 이제 그 ‘재단’을 자본이 하고 있다. 투자 대비 효율성이 떨어지면 당장 상품성이 있는 용도를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우리는 종종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단어로 설명하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본의 문제 이전에, 특정한 용도나 기능을 부여하지 못해 안달인 우리의 병적 태도다. 이미 자본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겐, 특정한 용도나 기능은 이미 자본으로 환원된 개념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17~18세기 유럽 국가나 삼청교육대 시절과 크게 다르지않다. 방치된 노들섬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zue, 1925~1995)와 가타리(Felix Guattari, 1930~1992)는 <앙티오디푸스(Anti-Oedipus)>(1977)에서 모든 것을 특정한 기능과 용도로 ‘포획’하려는 자본주의의 병적인 특성을 지적하며, 이를 벗어나려는 ‘탈주선(a line of flight)’의 필요성을 강변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아직 자본주의에 의해 포획되지 않고 특별한 용도나 기능으로 재단되지 않은 것에서만 새로운 개념, 새로운 기능, 새로운 감각의 탄생이 가능하다. 노들섬은 절대 방치되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시대 특정한 정권의 가치관에 의문을 던지는 아주 ‘유용’한 공간이었다. 특정한 용도나 기능을 강요하기보다는, 미래를 위해 가능성을 남겨뒀으면 좋겠다. 나에게 ‘방치’된 노들섬은 그 가능성만으로도 아름답다.문화+서울

글 조한
현재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이며 한디자인(HAHN Design) 대표로 건축·철학·영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간·공간’에 관한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건축가 조한의 서울탐구>(돌베개, 2013)가 있다.
사진 조한, 밴드오브노들
www.bandofnode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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