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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8월호

사회적 악인과의 사투 다루는 ‘헬조선 장르’ 전성시대 더 밝아지고 더 나빠진 사회의 초상
지난해 흥행한 영화 <베테랑> <내부자들>과 같이, 가진 자들의 위선과 권력의 민낯을 드러내고 이들과의 사투를 다루는 이른바 ‘헬조선 장르’물이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정의가 맥을 못추는 사회, 영화와 드라마의 주인공은 악인과의 사투 끝에 더러 신기루 같은 승리를 얻기도 한다. 급기야 대중이 “개, 돼지”로 일갈된 2016년, 영화는 또 현실은 계속 나아질 수 있을까.

강상준의 썰 관련 이미지

최근 OCN에서 방영 중인 드라마 <38사기동대>는 온갖 낯익은 광경으로 그득하다. 시청 세금징수국 공무원의 악전고투를 그린 이 작품은 법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악덕 고액 체납자를 응징하기 위해 전문 사기꾼과 결탁, 사기를 쳐 체납 세금을 걷는 것을 골자로 한다. 조금은 황당한 발상일지 몰라도 그 배경만큼은 결코 허투루 볼 수 없다. 국세와 지방세를 포함해 무려 57억 7000만원의 세금을 체납한 극 중 어느 작자만 봐도 답은 금방 나온다. 그는 세금도 못 낼 정도로 쪼들리는 것이 아니라 강남에만 10여 개의 룸살롱을 운영하며 누구보다 호의호식하는 치다. 심지어 법망을 피하려 아등바등하는 것도 아니다. 고위공직자와의 유착관계를 바탕으로 부정한 재산을 유유히 지켜낼 뿐만 아니라, 늘 없는 자들을 업신여기며 부패한 기득권층에 대한 적대감을 켜켜이 쌓아올린다.
그렇다고 이자가 정점에 자리한 절대악인 것도 아니다. 57억 7000만 원을 어렵사리 회수했더니 그 위에는 500억짜리 체납자가 더욱 견고한 벽을 쌓고 있다. 애초에 정면 돌파는 불가능했다. 법은 이미 가진 자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으니 이들과 맞서기 위해서는 또 다른 ‘반칙’밖에는 답이 없었던 것이다. <38사기동대>는 악덕 체납자를 상대로 여러 명이 협력해 펼치는 범죄를 면밀히 그려내는 일종의 케이퍼 무비(Caper movie, 강탈영화) 형식을 취하지만 낯익은 건 이런 장르적 구조만이 아니다. 악을 그려내는 방식이야말로 시종 기시감을 자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나쁜놈들 전성시대’

작년 한 해 가장 화제가 됐던 영화들 또한 피차 일반이다.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은 한낱 유희로 일용직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 재벌가 자제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베테랑 광역수사대의 대결을 그린 영화다. 천만 관객의 호응을 받은 <베테랑>의 주역은 단연 재벌3세 조태오(유아인 분)였다. 영화는 조태오의 악행을 세세하게 보여주며 그의 악마성을 한껏 부풀림으로써 영화 말미 반드시 처단되어야 할 악의 축으로 내세웠다. 직위를 이용한 일방적인 폭행과 은밀한 마약 파티 등은 재벌 조태오를 더더욱 생생한 악역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2015년 또 하나의 화제작인 <내부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정재계 수뇌부의 끈끈한 공생관계에 보수 언론까지 가세한 형국은 충분히 관객의 공분을 살 만했다. 특히나 영화는 단순히 뉴스에서 보아오던 사건의 정황을 나열하는 데 그치는 법이 없었다. 대중을 ‘개, 돼지’에 비유하고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저열한 작태와 하수인의 손목을 자르고 심지어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데도 거리낌 없는 그들의 행태를 줄줄이 보여줌으로써 법과 정의 위에 도사리는 악의 정체를 낱낱이 전시했다.
어디 이뿐인가. 영화 <성난 변호사> <치외법권> <검사외전> <특별수사: 사형수의 편지>를 비롯해 드라마 <어셈블리> <동네변호사 조들호> 등은 모두 실정법 위에 군림하는 존재를 악으로 두고 여기 속절없이 스러져가던 약자들의 극적인 역전승을 그린 작품이다. 위정자, 재벌 등 그 위치야 어찌됐건 악의 모습은 대개 비슷하다. 겉으로 보이는 높은 사회적 위상과는 무관하게 그들의 민낯은 하나같이 추악하기 짝이 없다. 선민의식을 바탕에 둔 그들의 말 하나하나는 늘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서민의 가슴을 후벼 파기 일쑤다.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해 인명을 경시하는 것은 마치 기본 소양으로 보일 정도. 온갖 위법행위를 일삼지만 그럼에도 법으로는 이들을 붙잡을 수 없다. 이를 확증하는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되며 자연히 주인공 측의 좌절도 내내 계속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결국엔 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거나 그치들의 얕은 꾀를 역이용해 제 무덤 파게 만드는 술수로 승리하곤 한다.

승리의 카타르시스를 맛보고 싶다, 현실에서도

물론 이 모든 악은 대단원에 이르러 어느 정도 척결되기 마련이다. 당연히 그러기 위해 구축한 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는 법은 없다. 그동안 휠체어 타고 검찰 출두하던 회장님들 모습에서 익히 봤듯이 단지 법정에 세우고 감방에 보내는 것만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어렵사리 악을 처단하고 난 후 그와는 견줄 수도 없는 거악(巨惡)을 발견하고 여기 좌절하는 탐정의 하드보일드 스토리와도 같아 보인다. 뉴스에서 늘 보던 사건에 살을 붙인 듯한 악, 그리고 그에 대항해 또 다른 악으로 맞서는 한국판 누아르, 한국형 하드 보일드가 지금 우리 시대 이렇게나 차고 넘친다.
이유야 뻔하다. 얼마 전 ‘신분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발언만 봐도 충분히 알 만하다. 아무리 용 나는 개천 마른 지 오래라지만 교육부 요직에 있는 공직자마저 민중을 “개, 돼지”에 비유하며 “먹고살게만 하면 된다” 말했다는 것은 가슴 아프도록 상징적인 사건이다. 우리 시대 거의 유일무이한 신분 상승 기회인 교육 분야에서조차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은 애초에 위선으로라도 양극화 현상을 해결할 의지가 없었다는 얘기 아니겠는가. 영화는 그저 실존하는 우리네 절망을 그대로 이야기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현실은 늘 픽션보다 강력하다. 그래서일까. 진짜 현실에 살을 붙여 완성된 ‘가진 자들의 악행’은 너무나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지만, 상대적으로 이를 깨부쉈던 대단원의 카타르시스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해결책만큼은 현실에서 영감을 얻을 수 없었던 탓에 늘 영화적 판타지에만 머물렀기 때문이다. 법과 정의로는 맞설 수 없는 자들을 대놓고 악으로 설정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우리 시대. 그렇게 영화는 오늘도 계층화 사회라는 지옥 속에서 한 줌 희망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연한 악을 응시한 채 늘 희미한 환상으로 위안받는다. 아마도 이런 ‘헬조선 장르’는 당분간 계속 양산될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영화도 반드시 진화해야 한다. 이제는 선연한 악만큼이나 선연한 승리가 필요하다.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문화+서울

글 강상준
등의 매체에서 줄곧 기자로 활동하면서 영화, 만화, 장르소설, 방송 등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글을 쓰며 먹고살았다. <위대한 망가>를 썼고, <매거진 컬처> <젊은 목수들>을 공저했으며, <공포영화 서바이벌 핸드북>을 번역했고, <좀비사전> <탐정사전>을 기획, 편집했다. 현재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겸 프리랜스 편집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사진 제공 CJ E&M, 퍼스트룩, 호호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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