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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호

시인 · 국회의원 도종환 시란,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
<접시꽃 당신>의 시인으로 알려진 도종환은 1989년 전교조 결성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수인의 몸으로 시집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1989)을 발간했다. 그는 교사로, 시인으로, 시민운동가로, 정치인으로 활동해왔다. 그는 각자의 마음속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이미지화되어 있을 것이다. 올해 새로운 시집 출간을 앞두고 있는, 여전히 시와 정치의 길을 함께 걷는 도종환 시인과 만났다. 풀어야 할 숙제가 너무 많은 2016년,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문학진흥법, 국립한국문학관 설립, 그리고 시와 정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

<강마을 아이들>(1989)이라는 책을 초등학교 때 읽은 적이있다. 도종환 시인이 재직하던 동이중학에는 친누나와 마을 형들이 다니고 있었다. 아이들의 글을 모아 책을 내주고 학생들에게 체벌을 하지 않는 교사가 당시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형들은 책을 들고 다니며 자기 글이 실렸다고 자랑하기에 바빴다. 그때부터 나는 시인이라는 존재는 학생들을 가르치며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중학생이 되어 나도 모르게 시를 쓰기 시작했다.
<접시꽃 당신>(1986)이 베스트셀러에 오를 때, 정보과 형사는 도종환 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형사는 교육청에 압력을 넣어 다른 학교로 전근을 보냈고 시의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캐물었다. 교장, 교감이 도종환을 감시하는 비용을 갖고 싸우는 바람에 학교에서도 일거수일투족 감시당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89년 전교조 결성을 주도한 혐의로 그는 구속됐다. 그때 쓴 시들이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에 실려 있다.
해직된 뒤 책임져야 할 일은 더 많아졌다. 각종 집회와 행사, 전교조, 민예총, 민족문학작가회의, 지역의 문학·문화 운동을 이끌었다. 성격이기도 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일이 많았고 누가 봐도 몸이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자율신경 실조증이 찾아왔다. 그는 모든 활동을 접고 후배가 지어놓은 조그만 흙집에서 5년 남짓 요양하며 지냈다. 마당에는 날마다 새들이 날아오고 눈이 오면 굶주린 토끼와 노루가 내려와 먹이 주기를 기다렸다. 자연 속에서 배고픈 동물들을 살피며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지금도 건강을 물어오는 지인들이 있다. 그는 전교조 활동을 했거나 민주화운동을 했던 수많은 사람이 다 겪는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교사이며 유명한 시인이던 그가 해직, 투옥, 석방,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을 거쳐 비례대표 국회의원과 재선에 성공하기까지 후배 시인으로서 나는 도종환 시인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았다. 시인이 아닌 보통 사람으로 보아도 그의 삶은 너무나 과중한 일에 시달리며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었다. <부드러운 직선>은 도종환의 삶을 가장 잘 말해주는 시집이라는 생각이 든다. “담백하게 뒷산 품에 들어 있는 절집이/ 굽은 나무로 지어져 있지 않음을 본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모습은 도종환 시인의 성격과 닮았다. 겉은 부드럽지만 마음속에는 수많은 직선이 버티고 앉아 있는 모습, 야당 의원이면서 문학진흥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힘도 그 부드러운 직선에서 나왔다.
국회의원이 된 2012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교과서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한다는 이유로 도종환 민주통합당 의원의 시를 교과서에서 뺄 것을 권고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로 한 작가의 작품을 국가의 힘으로 억누르는 일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 4대강 사업,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가 잇따라 터졌다. 문인들은 충격 속에서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었고 2014년 8월 광화문광장에서 도종환 시인을 다시 만났다. ‘세월호 참사 특별법의 올바른 제정을 위한 한국작가회의 동조단식’장에서 만나자마자 동료 작가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자식 잃은 부모를 위로해주어야 하는데 국회의원으로서 한 게 없고 그 아픔을 승화해서 슬픔과 아픔을 헛되게 하지 말아야 하는데 지금 너무 무기력해져 있고 정신적으로 힘들다는 말도 했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도종환 시인은 시를 내려놓은 적이 없다. 투옥돼 있던 당시에도 어떻게든 시를 썼고 의정활동에 바쁜 지금도 작품활동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시집 <부드러운 직선>은 그런 그의 삶을 가장 잘 말해주는 시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선 의원이 되신 것을 축하드려야 할지 위로해드려야 할지요.

국민이 여소야대를 만들어준 것에 대해 감사하지만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이 든다. 선거 3일 후 안산에서 열린 세월호 2주기 추모식에 다녀왔다. 세월호 가족 합창단의 노래를 들었는데 “십 년이 가고 백 년이 가도 잊지 않을게”라는 노래를 듣다가 눈물이 났다. 그날 광화문광장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매를 맞아야 하는데 비를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퍼하는 사람과 함께 비를 맞는 것, 함께 젖는 것이 정치라고 생각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정치를 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2012년 19대 총선 민주당 비례대표 심사가 끝난 뒤 법조인은 많은데 문화예술인이 없다는 지적 때문에 당으로부터 문화예술계 비례대표 제안을 받았다. 당시 문학계 어른들과 상의를 하고 정치에 입문하게 되었다. 마침 백낙청 선생님이 1987년 체제와 다른 2013체제 만들기에 대한 책을 내셨는데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데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다. 정치를 하기 위한 특별한 준비 없이 시작해서 시행 착오도 많았다.

의정활동 중에 꾸준히 시 쓰는 비결이 궁금합니다.

감옥 안이나 논산 훈련소에서도 썼는데, 국회 들어왔다고 안 쓰겠나. 바쁜 것으로 따지면 직장인이나 고3이랑 같이 생활하는 선생님들이 더 힘들 수도 있다. 국회의원은 그래도 감옥보다 낫지 않나. 시심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쓰는 게 시인이다. 선배 문인과 상의했는데 고은 선생님은 어디서든 다 쓴다고 말하셨다. <만인보>도 감옥에서 구상했고 김사인 시인은 농담으로 “내가 대신 써줄게”라고 말하더라. 어느 날 왜 시안 써주냐 물었더니 “써주려고 하면 발표했고 써주려고 하면 발표했고…”라는 말에 웃었다. 감옥에서 미결수로 있을 때 대학생이 몰래 가져다 준 볼펜 심으로 책 마지막 장에 시를 써 종이를 밥풀에 붙여서 감춰놓았다. 비누 포장지 안에 쓰고 숨겨놓기도 했는데 출소할 때 많이 가지고 나왔다. 그 안에서 쓴 시들이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과 <당신은 누구십니까>에 들어 있다.

2015년 ‘국회를 빛낸 바른 언어상 상임위 모범상’을 수상하셨습니다.

국회의원은 싸움만 하는 사람들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정치 혐오주의는 중간층의 이탈을 유발한다. 잘못된 것은 싸워서 막고 관철시켜야 할 것은 관철시켜야 하는데 문제는 싸우는 것이 아니라 싸워야 할 때 야당이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갈등을 잘 관리하고 조정해서 유익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게 정치이다. 합리적인 태도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는 동안 품격을 잃지 않는 정치가 되어야 한다. 특히 정치는 말로 하기 때문에 말의 품격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일치를 위한 정치포럼’에서 그런 사람을 격려하고자 주는 게 이 상이다. ‘국회를 빛낸 바른 언어상’인데 그 상을 여러 번 받았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

“국회의원은 그래도 감옥보다 낫지 않나. 시심이 있으면 어떻게 해서든 쓰는 게 시인이다. 선배 문인과 상의했는데 고은 선생님은 어디서든 다 쓴다고 말하셨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입장이 있다면 말씀해주시죠.

지금 국정교과서로 집필한 초등학교 교과서에 위안부라는 말과 위안부 사진이 빠져 있다. “정부에서 공표하면 막을 수 없을지 모르지만 이 정권이 몰락하는 변곡점이 될 것이다.” 국정교과서를 강행하려고 할 때 이렇게 말했다. 일제 군국주의시대, 히틀러의 파시즘 시대, 유신 시대에나 국정교과서를 사용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 교과서의 정통성이 북한에 있고 6?25가 남북 모두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기술되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교육부 공무원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들이 심의한 교과서다. 대통령이 말한 내용이 어느 교과서에 나오냐고 물으면 답을 못한다. 대통령만 ‘북한에 의한, 북한을 위한’ 교과서라고 믿는 것이다. 국정교과서 금지법을 발의해 국민의당과 힘을 합쳐 법안을 처리할 생각이다. 여당이 끝까지 반대하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 어떤 상황이 오든 국정교과서를 검인정교과서로 되돌리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1 한국작가회의가 2015년 4월 광화문광장에서 진행한 ‘4·16 진실 인양 촉구 문화제’에서 추모시를 낭송하는 도종환 시인.
2 2014년 8월 ‘세월호 참사특별법의 올바른 제정을 위한 한국작가회의 동조 단식’에서.

전교조나 정치 활동에 대해 힘들거나 후회한 적은 없나요?

때때로 많이 후회했다. 그 당시에 교육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가족에게는 무책임한 것이었다. 유치장에서 지금 각서랑 반성문 쓰고 전교조 탈퇴하면 풀어주겠다고 형사가 이야기할 때 아버지도 함께 계셨다. 갓난애가 둘이나 있는데 얘들은 누가 책임지냐고, 네가 이거 써도 사람들이 욕 안 하고 다 이해한다고 아버지가 말했지만 끝내 각서를 쓰지 못했다. 수갑을 채우는데 너와는 부자지간에 의절하겠다고,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냐 할 때 대답을 못했다. 교도소로 이송되면서 경찰서 유치장 벽에 머리를 대고 우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감옥에서 아들의 엽서를 받고 많이 힘들었다. 남의 자식 바르게 가르치자고 내 자식 한글도 못 가르쳤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교도소 벽에 뾰족한 물건으로 계속 금을 그어 십자가를 만들고 기도하며 버텼다. 그때가 가장 힘들었다. ‘감옥의 벽에 십자가를 새겨놓고’라는 시를 썼는데, 개인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가족에게는 무책임했다.

“아비규환의 절박한 현실에 들어가지 못하면 한 걸음도 못 나아간다. 누군가는 그 진흙 한복판에 들어가서 우리가 처음 왔던 때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더라도 일해야 세상이 달라진다.”

시와 정치를 어떻게 결합하시는지요?

작가는 한번 이름을 얻으면 그 이후에는 독자에게 많이 팔리는 책을 쓸 수도 있다. 그렇지만 문학은 문학으로 평가받아야 된다고 생각했고 당시는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사회적 역할이 있었다. 문학도 그 길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감옥도 가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지금 현실 정치에 관여한 것까지,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은 자기 운명을 사랑하는 것이고 현실 정치와 문학, 둘 다 놓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네루다는 칠레 민주화에 기여하면서 문학적으로도 훌륭했고, 빅토르 위고도 상원의원을 하고 난 후 <레미제라블>을 썼다. 외국에는 정치적인 역할을 하면서 깊이와 폭을 넓혀가는 작가도 있는데 우리나라는 실패한 경우가 많다. 나도 실패할 가능성이 있고 그래서 더 좋은 사례를 만들어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지금이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에 문학의 역할보다 정치적 역할에 더 충실해야 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개인적으로는 정치를 포기하고 싶다. 두가지 다 잘할지는 지나봐야 알 것 같다.

문학진흥법은 어떻게 진행해야 할까요.

세월호 참사 이후에 많은 문인이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현실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생각들이 표출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국정교과서 저지나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과 함께 문학판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년 표절 사건 이후로 많은 독자가 한국문학에 등을 돌리는 현실이다. 문학이 온갖 욕을 먹을 때 기자들이 몰려오지만 문학을 살려야 한다고 할 땐 두세 명 온다. 그게 작년에 우리가 목격한 것이다. 올해는 어떻게 문학을 살려야 하는지 고민하는 해로 전환해야 한다. 그런 고민을 담아 작년 문학진흥법도 통과시켰다. 국가나 지자체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문학인들이 주체로 나서야 한다. 10년 20년을 내다보며 독자들과 함께 노력해야 한다. 지금 정권은 문학과 출판 정책이 거의 없다. 정권을 교체한다면 최소한 책의 초판 물량 정도는 수용할 수 있도록 공공도서관을 1500개 정도로 점차 늘려야 한다. 국립한국문학관 유치를 단체장의 치적을 쌓기위한 것이 아니라 문학을 사랑하는 도시 만들기, 문학을 사랑하는 시민이 많아지는 계기로 삼으면 좋겠다.

서울의 ‘지하철승강장 시’와 관련해 최근 논란이 있습니다.

일상에서 문학을 접하는 방법으로 교과서나 ‘지하철 승강장시’가 있다. 좋은 시는 사람의 마음을 위무하고 영혼을 바꾼다. 그런데 공무원들이 방법을 잘 못 찾는 것 같다. 전문가와 시민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위원회를 만들어서 하면 되는데 문학 단체에 기계적으로 배분하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 없애기보다 지혜를 모았으면 좋겠고, 장기적으로 국문과나 문예창작학 전공자가 행정공무원으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공무원들은 문학 쪽 일을 맡으면 겁을 내고 빨리 부서를 옮기고 싶어 하는데 토목이나 전산, 행정처럼 문화예술 전공자가 공무원이 되어서 그 분야는 전문적으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선거 기간에 정치인이 되었다는 비판을 많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선거 기간에 많은 유권자에게 욕도 먹고 개인적으로는 마음 아픈 게 “시나 쓰지 무슨 정치를 하냐, 왜 진흙탕에 들어가냐”는 말을 들었을 때 식당이나 길에서 설명을 할 수 없었다. 윤동주 시인에게 “시나 쓰지, 무슨 ‘교토 조선인 유학생 민족주의 그룹’을 만들어서 민족운동 하고 학습하냐고, 영혼도 맑은 사람이…”라고 말했다면 과연 무슨 대답을 했을까. 윤동주는 외면할 수 없는 조국의 현실 때문에 혼자 깨끗하게 사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지금도 일제강점기 못지않게 위안부 문제, 세월호 참사, 국정교과서 강행을 비롯해 너무나 많은 문제가 있다. 진흙이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고, 진흙 속에 들어가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몸부림치는 게 현실 정치고, 그 아비규환의 절박한 현실에 들어가지 않으면 하나도 바꿀 수 없다. 누군가는 그 진흙 한복판에 들어가서 우리가 처음 왔던 때보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더라도 일하는 사람이 있어야 세상이 달라진다. 문인들 중에도 정치권력을 갖고 싶어 하냐고 욕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단순하게 현실 정치 권력을 갖고 싶어서 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드리고 싶다. “정치란 공동체의 행복에 기여하려는 갈망의 표현이다. 그래서 정치란 무엇보다도 가장 순수한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이다.”라고 체코의 극작가이자 대통령이던 하벨이 말했듯 정치야말로 가장 시적이어야 한다.문화+서울

글 김성규
1977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다.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너는 잘못 날아왔다>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가 있다. 신동엽문학상과 김구용문학상을 수상했다.
사진 최재식, 한국작가회의
장소 후원 길담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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