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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4월호

전형을 비껴 시인의 시간을 구현한 건축, 윤동주문학관 반노스탤지어의 오래된 장소
건축에서 시간을 담는 일은 중요하다. 서울의 건축에 특징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이 도시가 쌓아온 시간과 이야기를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윤동주문학관은 시인의 연고와 직접 닿은 곳이 아님에도 그의 시간과 시의 의미를 잘 살려낸 공간이다. 기와나 돌담을 얹는 식의 ‘만들어진 노스탤지어’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간 시간의 흔적을 드러내는 건축으로 공간의 여운이 길어졌다.

노스탤지어는 언제부터 현대의 지성들에게는 재미없는 단어가 되었을까? 복고, 빈티지의 추종 등등 딱 봐도 신기한 정도에서만 그치며, 지적인 호기심을 주지 못하는 감성의 것들이다. 1세기 전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아돌프 로스는 ‘지역의 장인이 만든 수술이 달린 구두는 모차르트도 듣지 않고 라틴어도 할 수 없는 일개 촌부의 작업이므로 노력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자신 같은 지식인들은 그런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했다. 지금 생각하니 제일 명쾌한 답이 아닌가 한다.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지식인의 작업은 개인의 기록만이 아닌, 사회에 의미 있는 정신을 내놓아야 하는 사명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인간사의 시간적 흐름에 무관한 작업을 하기도 무책임하다. 새로운 실험이든, 노스탤지어에 반하는 작업이든 건조 환경의 형성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의 연속성을 새로운 어휘로 드러내는 것이다.

건축이 시간을 드러내는 몇 가지 방법

연관 일러스트 이미지윤동주문학관 제3전시실 ‘닫힌 우물’은 시인의 후쿠오카 감옥시절에서 모티브를 얻어 설계한 공간이다. 원래 있던 물탱크를 원형 그대로 살려 시인이 느꼈을 억울함과 답답함을 관객에게 전한다.

1990년대의 호황과 개발에 힘입어 빨리빨리 지은 근생 건물들의 짧은 시간이 담긴 건축 표면에 염증 난 건축가 중, 현재 서울시 총괄건축가인 승효상은 코르텐(Corten Steel)이라는 녹슨 철로 시간성에 대해 주장했다. 재료 그 자체에 생성과 풍화의 순간을 담고 있는 표면으로부터, 현대 물질문명의 타락을 꾸짖는 메시지를 만들어냈다. 시간이 윤리인 셈이었다. 무표정하게 칠해지지 않은 풍화된 철판이 타락하지 않은 것이었다. 다다이즘 작업에서, 일상에서 발견된 사물(Found Object)이 예술에 대한 저항이었던 것처럼, 철판 한 장이 윤리의 상징이었다. 김해 봉하마을의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의 병풍 같은 벽에도 코르텐 강판이 둘러쳐져 있다. 그리 화려하고 웅장하지 않은 소박한 저항처럼 보인다. 우리네 삶과는 다른 풍화된 듯 보이는 철판은 비유를 해본다면 부뚜막에 걸린 솥단지와 같은 친근감일까? 노스탤지어와는 다른 추상이 들어가 있다.
이와 반대로 노스탤지어를 위해서는 한옥, 돌담, 처마 등의 옛 요소들이 되찾아졌다. 별 뜻 없어 보이는 전근대적 기와지붕 풍경의 반복이 시간성을 담보하는 툴이 되다. 대량생산과 기계 맞춤 생산이 가능한 현대에서 노스탤지어는 ‘그땐 그랬지’ 하는 편한 느낌을 자아낸다. 빈티지나 혼성의 시간, 멀쩡한 나무를 불에 그을려 만드는 빈티지 가구와 인테리어의 코드도 다를 바없다. 오래된 사진첩의 한 페이지처럼 도시에는 이런 구석도 필요하게 되었다. 현재를 잠시 잊기 위한 도구처럼, 마치 여행을 온 것처럼 현실을 피해 있는 공간인 것이다. 필요하기는 하지만, 좀 더 의미 있는 공간이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의미 있는 이야기가 필요한 지점이다.

동주의 시간을 오롯이 전하는 허구의 공간

연관 일러스트 이미지제2전시실 ‘열린 우물’(© 진효숙).

윤동주문학관은 이야기가 교차하는 곳이다. 서울성곽의 북소문, 현재 창의문 즈음에 위치해, 성곽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중에 내려가다 문학관을 방문한 사람들은 내가 방금 지나온 문학관을 ‘시인의 언덕’에 올라가 다시 한번 내려다보게 된다. 근처의 창의 문은 광해군을 축출하려는 인조반정의 세력이 문을 박차고 궁으로 진격한 길이며, 또한 김신조 일당이 넘어온 길이 훤히 보이는 곳으로 600년 서울의 시간을 목도할 수 있는 장소다. 지금은 성곽을 둘러가는 시민의 발길에 북악산 돌들이 닳고 닳아 미끄러운 알갱이가 된 길이지만, 시인의 고향·동무 생각, 친지, 동물, 곤충, 들풀, 꽃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는 곳이다. 마치 오래된 정원처럼 시인이 먼저인지 집이 먼저인지, 시인의 시는 일제강점기에 쓰여졌지만 그 음성은 지금도 맑게 들리고, 현대인의 감성을 터뜨리는 반노스탤지어적인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 이 집도 시간이 지나면 시인처럼 점점 더 소박해져서 어느 시기에 지어진 것인지 알 수 없을 듯하다. 현재 이 문학관은 영화감독, 시인, 건축가, 사진작가 등 문화예술인들에게 윤동주의 정신을 공간으로 승화한 수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건축가 이소진은 1차 설계 완결 후 현장에서 발견하게 된 가압장을 보고 대지의 이야기를 증폭시킬 수 있는 보석을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설계는 전면 바뀌게 되고 줄어든 예산 덕에 전시 기법 또한 건축 공간과 일체화해 설계됐다. 물탱크의 바닥에 맞추어 관람자가 진입하도록 해 마치 땅에 묻힌 감옥의 느낌을 형성하고 시인이 체험한 억울함,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이곳은 현장이 아닌 허구의 공간이지만 그가 학생 시절 자주 올랐던 시인의 언덕에 가까운 곳에서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무거운 문이 닫히면 시작되는 동주의 아픈 시간들, 어려운 시절에 시인의 꿈을 꾸는 무기력함에 대한 참담함, 그의 언어는 공간으로 살아남아 아웅다웅 싸움이 심한 도심을 한발 떨어져 사랑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게 한다. 싸우지들 말게나, 아프지 말게나, 우리 같은 하늘을 지붕 삼아 꽃과 나무와 물과 새들과 이 도시를 청초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노스탤지어를 정신으로 승화시킨 시인의 시구를 떠올리게 하는 이 문학관 같은 공간이 우리에겐 정말 많이, 길모퉁이를 돌아서면, 아니면 가던 길을 되돌아가서 곱씹어볼 만큼 필요하다.

글 송하엽
중앙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미국건축사. 저서로 <랜드마크; 도시들 경쟁하다> <파빌리온, 도시에 감정을 채우다> <표면으로 읽는 건축>이 있으며, 서울건축문화제에서 ‘담박소쇄노들: 여름건축학교’ ‘한강감정: 한강건축상상전’을 기획했다.
사진 진효숙 건축사진가, 종로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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