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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페인터, 뮤지션, 그리고 어른 백현진 이것은 각자의 그림, 고유의 아름다움
음악, 미술, 영화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활동한 아티스트 백현진. 1월에 발매된 프로젝트 ‘방백(방준석, 백현진)’의 새앨범 <너의 손>은 그가 냉소를 덜고 전보다 편한 옷을 입었음이 느껴지는 작업이다. 곧이어 진행된 개인전 <들과 새와 개와 재능>은 그가 여전히 편하지 않은 시간을 살고 있음을 가감 없이 드러낸 작품으로 채워져 있었다. 늘 권위를 의식하지 않고 ‘마음대로’인 태도는 그대로지만 그는 동어반복을 경계하는 신중한 사람이다. ‘어른’이라는 단어와 조금 더 가까워진 아티스트 백현진을 만났다.

1 개인전 <들과 새와 개와 재능>이 진행된 PKM갤러리에서 만난 백현진 작가.

백현진이라는 아티스트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는 꽤 여럿이다. 그가 처음 공식적으로 ‘일을 보기’(그는 음악을 만들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작업한다는 것을 ‘일을 본다’고 표현한다) 시작한 것은 1994년 어어부 프로젝트의 음악 활동을 통해서였다. 홍익대 조소과에 다니던 때 뮤지션 장영규와 함께 시작한 어어부 프로젝트의 음악은 이른바 ‘아방-팝(Avantpop)’으로 불린다. 흐느끼듯 내지르는 백현진의 창법과 장영규가 만들어내는 그로테스크한 사운드는 분노와 냉소로가득한, 다소 직설적인 가사의 메시지를 증폭시키며 청자들에게 각인됐고, 20년에 걸쳐 4개의 정규 앨범을 내며 활동을이었다. 2000년대 들어 백현진이 활동의 방점을 찍은 것은 그림이다. 추상회화를 꾸준히 작업한 그는 2000년대 중반상업 갤러리의 소속 작가였고 서울,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열린 개인전 및 단체전을 통해 그의 물건(그는 작업물을 ‘물건’이라고 표현한다)을 선보였다. 혹자는 영화에서 백현진을 인식했을 수 있다. <북촌방향> <경주> <특종: 량첸살인기>를 비롯한 다수 작품에 출연해 의뭉스러운 캐릭터들을 연기했다. 종횡무진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 그는 분명하게 화가, 뮤지션의 순서로 자신의 직업(?)을 정리한다. 그리고 최근 두 영역에서 새로운 결과물을 냈다. 영화음악에서 두각을 드러내온 뮤지션 방준석과의 프로젝트 ‘방백’의 앨범 <너의 손>과 약 한 달간 진행한 개인전 <들과 개와 새와 재능>(1. 27~2. 27, PKM갤러리)이 그것이다.

1 개인전 <들과 새와 개와 재능>이 진행된 PKM갤러리에서 만난 백현진 작가.1 개인전 <들과 새와 개와 재능>이 진행된 PKM갤러리에서 만난 백현진 작가.

덜 독특하지만 편한 옷을 입은 시기

비슷한 시기에 나온 결과물들에 대해 그는 “곡을 써서 노래부르고 그림 그리는 것이 내 일이니 그 일을 계속해왔고, 우연히 앨범 발매와 전시의 시기가 비슷해져 눈에 더 잘 보이는 것뿐”이라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이라기에는 두 사건에서 전과 다른 변화나 어떤 경향을 읽게 되는 게 사실이다. 그의 노래는 주로 한 사내의 구체적인 이야기이고, 극히 개인적이되 불합리한 권위와 부조리에 대한 염증, 혹은 사랑에 대한 처연함을 드러낸다. 방백의 노래에서도 화자가 서 있는 지점은 변함없지만 한때 ‘위악적’이라는 인상까지 준 냉소는 거의 사라지고 지금은 누군가에게 “이 노래가 혹시나 너에게 가서 조금은 힘이 된다면”(방백<바람>)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작정한 불편함’ 같은 게 사라진 것이다.
“청년 시절에는 불편한 물건들을 만들어내고 싶은 마음도 컸어요. 당시 소설가 장정일 씨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는데 그가 ‘소파에 편하게 누워서 한가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쓰지 않겠다’고 말한 것을 보며 크게 동의했어요. 청년기에 ‘어떤 식으로 작업해야겠다’라고 큰 방향을 세우면서 ‘그렇게 호락호락한 물건을 만들어내진 않겠다’고 절박하게 작정했던 게 기억나는데,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물리적인 시간을 통과해온 사람이 이제 마흔 중반이 돼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 마음이 온전히 남지는 않고 조금씩 변해온 거겠죠.”
한 사람의 자연스러운 변화이자 어어부와 방백의 차이이기도 하다. 어어부는 “저기 누가 있건 없건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자”는 태도로 작업하지만 이번 방백 앨범은 “불특정 다수의 (이 음악을 듣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상정하고” 진행한 작업이다. 브라스, 현악을 비롯해 다양한 세션이 참여해 풍성하면서도 절제된 사운드를 내는 데, 백현진의 독특한 창법은 의외다 싶을 정도로 사운드와 조화되며 전에 느끼지 못했던 ‘온기’를 전한다. 삶에서, 노래에서 그는 긴 면벽의 시간을 보낸 이처럼 말수가 줄었고 단어를 고심해 적으며 마음의 살풍경을 드러낸다. 냉소를 조금씩 지워낸 이의 몸과 마음은 전보다 편해졌고, (음악을 옷에 비유할 때) 어어부보다는 방백이 덜 독특한 옷이어도 자신에게 잘 맞는다는것을 느꼈다. 대신 그 모든 작업과 관련해서 허투루, 습관적으로 말하지 않기 위해 많이 생각한다.

몇 가지 사실들과 추측들과 망상들과 침묵			2015~2016 │ Oil, acrylic spray, oil pastel, enamel spray on canvas │ 180×150cm │ Courtesy of the artist and PKM Gallery.몇 가지 사실들과 추측들과 망상들과 침묵
2015~2016 │ Oil, acrylic spray, oil pastel, enamel spray on canvas │ 180×150cm │ Courtesy of the artist and PKM Gallery.

당신이 보고 들은 게 맞는 것

1월 27일부터 2월 27일까지 PKM갤러리에서 진행된 백현진 작가의 개인전 <들과 새와 개와 재능>에서는 회화 및 드로잉 신작 25점이 선보였다. 노래 가사에서 그가 언어를 얼마나 조탁하는지가 느껴진다면, 그림에서는 붓질 하나에 고민했을 시간을 가늠할 수 있다. 그림은 가사처럼 구체적이지 않고 계획된 패턴을 반복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시작되고 어디서 붓질이 멈출지 작가 자신도 예측하지 못하며 그려나간 작품이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 이 사회가 어떠했는지를 염두에 둔다면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 동시대성을 잃지 않으려는 예술가로서 그는 그때그때 직관에 의해 계속 “볼일을 보기” 때문이다. 그림에서 그는 단숨에 생각을 뽑아냈다가 이내 부정했고, ‘갈겨’라고 속말을 내뱉었다가도 어떤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나았다고 생각한 듯 두꺼운 칠로 덮어버렸다. 많은 부정적인 단어와 보이지 않는 힘이 눈코입귀를 조여오는 한국 사회에서 관객이 보낸 시간과 작가가 보낸 시간이 뭐 얼마나 다르겠는가. 그는 자신의 작업 태도가 그렇듯 관객도 여타 평가나 권위를 의식하지 않고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며 각자의 느낌을 가져가면 좋겠다고 말한다.
“정말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들으면 돼요. 그게 맞아요. 제일 소중한 거고요. 자기가 생각한 게 맞는지 아닌지는 작가에게 확인받을 필요가 없어요. 저는 ‘저를 어떻게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전혀 없고요, 다만 그림을 보신 분들이 ‘이러이러한 게 안 느껴진다’고 한다면 그건 제 숙제죠. 내가 작업을 많이 하면 내 일에 대해 오해가 줄어들 수 있겠구나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에게 이번 개인전은 여러모로 의미가 다르다. “전시를 준비할 때 세월호라는, 말도 안 되는 참사가 일어났어요. 이후 몇 개월이 흐르면서 스튜디오에서 계속 붓질은 하고 있는데… 힘들었죠. 오만 가지 이유 때문에 이 작품들이 만들어졌지만 그 시기를 통과하면서 특히 참담한 심정으로 붓질을 했어요. 그래서 이 전시는 개인적으로 전과 좀 다르게 느껴지는데, ‘중견 작가’로 분류될 만한 생물학적인 나이에 연첫 전시이기도 하고, 그전에 갖지 않았던 어떤 심정을 가지고 준비한 전시이기도 합니다.”

조금 다른 의미의 ‘어른’의 노래

꽤 오랫동안 백현진 하면 거론되던 단어는 분노, 냉소, 괴물 등이었다. 노래 가사에는 날이 서 있었고 이를 표현하는 백현진의 목소리는 굵게 선 핏대가 느껴질 듯 통렬하고 처연했다. 최근 방백의 앨범 발매 및 그의 개인전과 맞물려 다수 매체가 백현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눈에 띄는 단어는 ‘어른’이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방백의 음악에 대해 ‘어른의 음악’이라고 운을 뗀 것이 꽤 적확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단지 그 인용일 뿐만 아니라 미묘하게 다른 의미인 ‘사회의 어른’을 이야기하는 한 칼럼(<한겨레21> 제1097호 ‘작은 어른이 되는 일’)에서도 그의 음악은 맥락에 들어맞게 거론됐다. 많이 이야기된다는 것은 그에 대한 어떤 요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몇 년간 우리는 국가적인 재난이 닥쳤을때 응당 작동해야 할 정책적 시스템이 제대로 움직이거나 필요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것을 반복해 겪었다. 젊은 세대가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인문학적 통찰을 남긴 어른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난다. ‘어른’이란 단어의 무게감을 실감하는 때여서인지, 백 작가는 자신이 ‘어른’이라는 키워드로 거론되는 것에 대해 “쓸쓸하다”고 표현했다.
“그건 이 지역이, 이 도시가, 이 나라가 슬프다는 증거죠.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망가져 있기 때문에 저 정도의 일을 보는 사람에게도 어른이란 단어가 태그되는 것 같은데… 되게 쓸쓸해요. 어떻게 보면 제 나이 또래에서 저는 그냥 작업하는 사람이고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날라리인데, 어른스러운 어른이 좀처럼 없으니 저에게 그런 낱말이 붙는 것이겠죠.”
그는 다만 열심히 작업을 이어나가는 것으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좀 더 분명하게 전하려고 한다.
“절박하게 최선을 다해서 일을 봐야죠. 제가 좋아하는 작업하는 사람들, 이미 가신 분들, 연세 있으신 분들을 찾아보다 보면 생각보다 정말 많은 작업을 했다는 걸 알게 돼요. 그걸 확인할 때 좀 각성이 되는 것 같아요. 일 보는 걸 벽돌 쌓기에 비유하면, 제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벽돌을 아주 많이 쌓았더라고요. 그런데 ‘나 정도가 이만큼밖에 벽돌을 쌓지 않고 뭐하는 거지’ 싶은 거죠.
사람이 오랫동안 살면서 경험하고 심사숙고하다 보면 어떤 문장을 마음에 지니고 살아가게 돼요. 그게 ‘거짓말을 하지 말자’일 수도 있고 ‘남을 짓밟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가 될 수도 있죠. 저는 ‘인간의 문명은 수정, 개선, 발전이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아요. 각자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려내고 불러내야 하는 노래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 일들을 계속보는 수밖에요.”

이것은 그들 각자의 그림, 모두 다른 아름다움

2 올해 1월 발매된 방백의 앨범 <너의 손>.2 올해 1월 발매된 방백의 앨범 <너의 손>.

전시가 진행된 25일간 내내 그는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면벽(Face the Wall)’이라는 사운드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몇년 전부터 관심 두고 공부하는 아날로그 신시사이저를 이용해 전시장을 소리로 채우는 작업이었다. 이따금 미동하며 천장 높은 갤러리를 채운 기계음은 그의 작품과 꽤 잘 어울렸다. 정말 ‘미동’하는 정도여서 소리의 변화를 알아채기 쉽지 않았지만 그는 매일 주파수대를 조정하며 조금씩 다른 소리를 실험했고, 목소리와 퍼포먼스 동선도 매번 달리 했다. ‘어른’이라는 단어의 쓰임과 무게가 그렇고, 그가 요즘 가장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이준규 시인의 시어가 또한 그렇듯이. 반복되는 듯 보이지만 그 의미는 미세하게 다르고, 반복이 생성한 리듬 속에서 우린 각자가 부린 질문의 답을 계속 찾아간다. 그의 물건과 소리를 통해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 단어에 예민한 백 작가는 ‘아름답다’는 말을 “텅 비어 있는 말”이라며 각자 평생 느낀 것을 모아 자신만의 의미로 단어를 채워간다고 했다. 그 단어는 작가에게 한때 너무 거창하게 느껴져서 함부로 다루지 못하고 민망해하던 말이지만 그건 아주 상대적일 뿐임을 안다. 사랑도 그림도 음악도 그럴 것이다. “제가 작업하면서 혼자 ‘아 그냥 마음대로 하고 사세요, 나도 마음대로 할 테니’라고 종종 되뇌었어요. 그런데 시민들은 얼마나 마음대로 하고 사는지 모르겠네요.” 선문답처럼 이어지던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며 그가 던진 말에 잠시 멍해졌다. 우리는 얼마나 마음대로 하며 살고 있을까. 얼마나 벽돌을 더 쌓아야 하는 것일까. 10여 번째 ‘면벽’을 위해 걸어가는 백 작가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나름 할 수 있는 일을 해본다”는, 방백의 <다짐> 가사가 귓전에 맴돌았다. 문화+서울

글 이아림
사진 아라
작품 사진 제공 PKM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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