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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혹은 대담

3월호

비평 문화 활성화를 위한 방안 발전적 의견 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공론장이 필요하다
작년 본지 6월호에는 ‘비평의 사막화 현상’에 대한 칼럼이 실렸다.1공교롭게도 같은 달 문학계에서는 신경숙 작가의 표절 사건이 터졌고, 미술계에서는 지면을 벗어나 비평 행위를 해보자는 취지의 ‘비평 페스티벌’이 열렸다. 비평은 문화계의 핫 이슈로 떠올랐지만 이에 대한 논의는 슬그머니 사라졌거나 진전이 없는 상태다. 칼럼에서 언급된 ‘작품은 생산되는데 비평은 없는 현상’을 좀 더 깊이 있게 진단해보고자 연극, 문학, 미술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평론가들이 모여 비평에 대해 비평하는 시간을 가졌다.

단체사진

사회 |
이택광경희대 영미문화학과 교수, 문화평론가
토론 |
강수미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 미술평론가
김소연 연극평론가
정은경 원광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일시 |
2016. 2. 11
장소 |
서울문화재단 1층 책사랑

오늘 사회를 맡은 이택광입니다. 많은 사람이 비평이 죽었다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비평을 어떻게 다시 부활시킬 것인가’가 주제가 될 것 같습니다. 일단 각 분야의 현황을 진단하고 분야별로 비평의 활성화 방안을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소연
지금 ‘비평이 죽었다’라고 할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지적하는지, ‘비평의 부활’은 또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말하는지, 그것을 먼저 얘기해야 할 것 같아요. 대체로 비평이 죽었다, 비평이 위기다, 비평이 없다고 진단할때 언급되는 현상이라는 것이 비평가, 매체, 비평문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제도화된 비평에 대한 이야기인데 제도의 형식으로만 보자면 비평이 죽었다고 할 수 없죠. 전문지라고 일컬어지는 잡지도 많아지고 비평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활동하는 사람도 많아졌죠. 연극 분야만 놓고 봐도 연극평론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활동하는 분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도 비평이 죽었다, 위기라고 말하는 건 비평의 역할이랄까 영향력이랄까, 그런 것이 현저히 위축되었다, 약화되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겠죠. 그렇다면 비평을 활성화하자는 것이 비평가, 매체, 비평문이라는 약화된 비평 제도가 영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비평 제도를 잘 수선하자는 것인가? 그런데 매체 중심의 비평이 약화된 것은 매체 환경의 변화 때문인데, 그렇다면 매체 환경으로 문제를 확장시켜야 하는가? 등등의 의문이 든다는 거죠.

작년 신경숙 작가의 표절 문제는 단순한 표절 문제가 아니라 한국문학에서 비평이라는 장이 갖고 있는 외설성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고 보거든요. 비평에 대해서 누구도 말하지 못하던 상황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 봐요. 문학 쪽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해주세요.

정은경
신경숙 사태의 경우 다양한 문제가 이야기되었잖아요. 표절, 문학권력, 비평, 근대문학의 종언 등 많은 문제가 폭발했고 비평에 대해 많은 비난이 있었어요. 비평이 제대로 기능을 못했다는 지적에는 거의 100% 공감합니다. 요즘 출판사들은 상업주의와 연관되면서 그 안에서 일종의 주례사 비평, 상찬 비평을 하고 있어요. 젊은 비평가가 괜찮다 싶으면 입도선매하듯이 데려다가 소속 비평가로 키워서 해설도 쓰게 하고 좌담도 하게 해요. 이런 것들이 비평 안에서 이뤄지면서 비평의 공공성이 완전히 와해된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봐요. 예전에는 비평의 첫 번째 기능이 정보 제공이었잖아요. 지금은 인터넷만 검색해도 다 나오니, 비평가한테 정보에 관한 한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어요. 여기에 선도적 계몽주의가 사라지면서 어떤 것이 좋은 것이라는 공공성, 미적인 공통 감각이 깨져버리고 비평가의 존재 의의라는 것이 이 시대에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적인 변화도 원인이겠지요. 저는 이제 조금 다른 패러다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말한 것처럼 제도로서의 비평이 있고, 제도로서의 철학이 있다고 한다면 독일철학의 문맥에서 비평은 철학이거든요. 제가 볼 때 제도로서의 비평은 완결되었는데, 이게 아이러니예요. 제도로서의 비평이 완결되면서 비평하기가 사라지는 것이지요.

정은경
비평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저널리즘의 형태예요. 우리나라도 김동인과 염상섭이 최초의 비평가라고 알려졌어요. 근대 초기 신문이나 잡지의 논설 코너에서 분화되고 제도화된 것이 문학비평입니다. 유럽도 저널리즘 형태로 있던 서평과 리뷰가 제도화되었어요. 지금 대중매체에서 거론하는 비평이 그나마 우리가 기대하는 비평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문학 잡지도 많지만 그들만의 리그, 폐쇄성으로 인해 독자와의 소통 기능을 상실한 파편화된장이 되었어요. 그런 비평은 거의 읽히지 않죠.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신문의 서평은 거의 다 기자가 쓰고 있거든요. 사실 10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어요. 비평가가 공론장 안에서 사라진 것이지요.

공론장이 사라지면서 비평도 사라진 것인데요. 일단 미술비평과 관련해서 강수미 선생님께서 하실 얘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강수미 사진강수미 동덕여대 회화과 교수, 미술평론가
비평은 글쓰기뿐만 아니라 행위를 통해 이뤄져야 해요. 어디서나, 언제나, 누구나 비평 활동을 할 수 있는 장이나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강수미
지금 이 자리의 형식 자체가 기성세대가 된 우리에게 익숙한 편성이라고 봅니다. 각각의 분과(discipline)가 있고, 그 안에 창작이 있고, 그 창작에 대한 어떤 반응 내지는 창작의 후위(rear-garde)로서 비평이 있다는 인식 틀 안에서 비평에 대한 논의를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미술 분야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 다른 어느 시기보다 주목받고 있어요. 그러면서 사회 속에서 미술이 대상화가 되기 시작했죠. 하지만 그에 대한 담론 생산, 사고, 표현 활동은 ‘각자’ 하게 되었어요. 컬렉터, 큐레이터, 관람객 각자가 할 수 있는 식이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비평의 위기를 말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구심이 있어요. 논리적으로, ‘비평의 위기’라고 말하는 어떤 화자는 비평이 괜찮았거나 제 역할을 하던 시대를 상정하고 현재를 재단하는 것이지요. 비평이 권위를 갖던 시대와 비교했을 때는 위기인지 아닌지 얘기할 수 있지만, 무엇인가 계속 ‘표현되고 발설되고 발화된다’고 했을 때는 지금을 위기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봐요.
비평이 다른 활동과 비교했을 때 사회적 기능을 잘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아까 계몽 얘기가 나왔지만 지금은 누가 누구를 계몽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에요. 사실은 너무 밝아져서 끔찍한 시대가 되었단 말이에요. 굴곡을 만들어서 어딘가는 그늘 상태로 두고, 어딘가는 좀 더 노출해야 하는 시대가 아닌가 싶은데요. 각자가 정보에 너무 많이 개방되어있기 때문에, 반대로 비평의 판단(judging) 기능이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판단 기능 자체가 너무 약해져서 비평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제 문제의식이고요.
저는 비평을 저널리즘, 정보 제공과는 조금 다른 맥락으로 생각해왔어요. 현재 비평이 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건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묘사적 서술(describe)에만 그치기 때문이에요. ‘책상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책상이 어떠어떠한 상태로 어떻게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른 얘기예요. 현재 분야를 가릴 것 없이 작품에 대한 서술에 그치는 비평이 넘쳐나는건 비평 주체 및 대상이 서로를 사적 범주로 대해 침해하지 않거나 그렇다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서예요. 비난이 두렵기 때문에 절대 단순 묘사에서 판단으로 이행하지 않아요.

지금 현재 벌어지는 상황은 비평의 위기일 수 있죠. 그런데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사라진 건 아니에요. 정보가 넘쳐나고 많은 기술적인 리뷰가 비평을 대체하고 있지만, 사물의 본질을 논하고 사고 체계의 본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분명 호응을 받아요.

정은경
현대사회에 대한 하버마스(J rgen Habermas, 1929~)의 진단이 지금 비평에도 해당된다고 생각해요. 공론장은 없어지고, 사적이고 파편화한 것만 너무 많아요. 관심사를 같이 의논할 수 있는 공공성은 와해되었고요.
김소연
그럼 좋은 비평문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또 좋은 비평문은 어떻게 생산될 수 있는지, 비평이 이 사회 안에서 읽히고 영향력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의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비평가, 매체, 비평문이라는 지난 세기에 형성된 비평 제도, 즉 제도화한 비평은 양적으로는 확대되어 있어요. 그런 점에서 제도 자체는 확고해졌다고도 할 수 있죠. 그리고 낡아가고 있죠. 그런데 사회의 모든 것이 변화하는 상황에서 사회적 기능을 못하고 있는 거죠. 저널리즘이 가지고 있던 공론장을 형성하는 역할 자체가 무너졌고, 혹은 공론장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허상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고도 할 수 있고, 그런데 아직 새로운 장은 형성되지 않은 혼란의 와중이라고 생각해요. 한때 인터넷이나 SNS가 언론의 역할을 대신하리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지금 그 기대는 거의 무너진 것 같아요. 이슈는 등장하지만 소비되고 말죠. 논의가 심화되고 확장되게끔 하는 역할을 못하고 있어요.

사회적 기능, 좋은 비평 이야기를 하셨는데, 좋은 비평은 사실 나쁜 비평 아닐까요. 아까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나쁜 말을 하기 싫어해요.

강수미
저는 엄밀히 따져서 ‘비평 제도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노골적인 예를 하나 들면 대학에 비평 전공은 없어요. 비평과도 없고요. 비평은 대중과의 소통을 문제시해야 할 정도로 독립되거나 개체화된 분야나 활동이 아니에요. 다른 한편, 매체가 붕괴되었다고 하지만 사실 지금만큼 매체가 붐업(boom up)된 시대도 없어요. 그 매체들이 지나치게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비평이 압도당하거나 존재 유무조차 관심 대상이 안 되는 것이거든요. 시카고 대학교수이자 미술비평가인 제임스 엘킨스(James Elkins)는 ‘우리 시대 비평의 위치는 어디에도 다 스며들 수 있는 위치’라고 얘기해요. 비평은 어디에도 스며들어가거나 현상을 관통할 수 있는 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어요.
비평이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하느냐고 할 때는 SNS든 아니면 SNS를 인용하는 저널리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봐야 할 것 같아요. 잘못되거나 완전히 사적인 의견조차 SNS에서 리트윗(retweet)되고 반응을 얻기만 하면 공론이 되는 상황을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다는 것이 현재 제 판단입니다. 우리는 이를 위기라고 평하거나, 해결책을 내거나, 현재와는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요.

크라이시스(crisis), 위기라는 말과 크리티시즘(criticism)은 어원이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비평은 계속 위기를 말하는 것이고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 자체도 비평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소연
저도 기존의 제도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으니 기존 제도를 잘 수선해보자는 데에는 회의적입니다. 저는 ‘비평’이라는 행위는 항상 있었다고 생각하고, 사회 변화에 따라 그행위가 작동하는 방식이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비평은 항상 다양한 양상으로 존재하죠, 인간이 사고하는 한은. 그래서 지금을 왜 비평의 위기라고 하는지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사실 SNS가 이슈를 생산하기는 해요. 그런데 SNS는 너무 휘발적이에요. 많은 사람이 달려들어서 얘기하지만 그러고 끝나는 거죠. 그다음이 없어요. 그런데 이게 SNS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작년 표절 논쟁의 경우 허핑턴포스트(이응준,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 2015년 6월 15일 게시)에 먼저 기사가 게재되자, 거의 모든 언론이 몰려들어서 이야기했죠. 그런데 그렇게 막 쏟아져 나오고 끝이에요. 지금 계간지로 이슈가 옮겨갔는데, 논쟁이 정돈되고 심화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죠. 표절 논쟁의 핵심적 비판 대상이던 계간지로 이슈가 옮겨지면서 그간 쏟아져 나온 비판에 대한 방어로 흐르고 있죠. 그점은 아쉽지만 그래도 아직 지켜볼 여지는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반면 SNS나 일간지 등에서는 이미 철 지난 이야기가 되었죠.
강수미
신경숙 사건에서 중요한 부분은 거기에 대해서 말하거나 책임진다고 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그 안에서 표절 행위를 덮을 만한 권위를 가진, 아니면 한 작가를 예술가로서의 창작력이 있다고 인정하는 권력을 행사하고 생산-재생산했던 사람들이라는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누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죠? 신경숙의 옹호론자든, 비판자든 사실 다 그 문학계 게토 안에 있어요. 이 전문가 그룹의 사고 안에서는 절대로 해결이 안 된다고 봐요.
반대의 상황이 미술계에서 있었어요. 국가가 운영하는 전시장(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에서 지원을 받은 젊은 작가(한정우) 개인전이 열렸어요. 이 전시를 젊은 필자(홍태림)가 자신이 만든 온라인 지면에 리뷰(twopage. kr/wordpress/archives/69)했는데 나중에 투서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전시 작품들이 미국 작가(Mike Womack)를 표절했다’고 말이죠. 필자는 그 미국 작가에게 따로 연락해서 사실 확인을 했나봐요. 온라인 지면에는 표절이라면서 국가기관에 공식 사과를 요구했고요. 국가기관도 사실 확인을 하겠다고 공표해놓고, 나중에 사과를 표한 팝업창(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지사항 2336번, 시각예술분야 차세대 예술인력 육성사업의 표절 발생에 대한 입장, 2015년10월12일)을 띄웠어요. 결과적으로 작가는 일부 작품에 대한 표절을 인정했고, 절필 선언을 했다고 하더군요. 일련의 사건이 이렇게 흘렀어요. 제가 주목한 것은 그 젊은 필자가 전시 리뷰어로 시작해서 검사, 판사, 리포터 등 여러 역할을 혼자 다 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거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당사자조차 여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면서 하는 거예요. 표절이라고 지목당한 작가는 스스로 작가 생활을 그만하겠다고 했어요. 그럼 이 친구는 무엇을 한 것이죠?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을 봤어요. 누군가가 부지불식간에든 미필적 고의든 비평가 행세를 하며 인터넷에서 여론몰이를 해한 예술가를 사회적으로 매장하거나, 공론 내지는 공적 제도를 흔들 가능성이 현재 산재한다는 사실 말이죠. 하지만 대개 그 근거는 철두철미하지 않고, 그 절차 및 사건의 처리 또한 객관적이거나 합리적으로 이뤄지지 않아요. 오히려 가장 손쉽고 구체적인 반응을 끌어내는 행위는 비난하는 거예요. 비난들이 선정적인 반응을 얻으면 갑자기 자기가 무엇인가를 다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등극해요.
두 사례를 대비시킨 건, 하나는 기성의 권력과 제도가 완강하게 잘 작동하면서 무엇인가를 보호했다면, 다른 하나는 젊고 권위에 찌들지 않았다는 주체의 말에 무조건 동의하면서 그것이 공적 시스템에서든 한 개인에게든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책임한 현실을 지적하기 위해서예요.

이택광 사진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학과 교수, 문화평론가
정보가 넘쳐나고 많은 기술적인 리뷰가 비평을 대체하지만, 사물의 본질을 논하고 사고 체계의 본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호응을 받아요.

김소연
말씀하신 두 경우가 결국은 같은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신경숙 표절 사건에도 중요한 여러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선정적인 이슈로 소비되고 끝났죠. 이슈가 선정적으로 제기되더라도 비평이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다면 논의를 더 심화시킬 수 있었을 텐데 지금 답보 상태죠. 마찬가지로 두 번째 경우도 문제 제기의 방식이 선정적일 수는 있는데, 뒤엉켜 있어서 그렇지 조금만 살펴보면 중요하게 검토할 문제들이 떠오르는 거죠. 그런데 마찬가지로 표절 판정이라는 선정적 사건으로 소비되고 끝나는 거죠. 두 사건이 보여주듯이 표절 판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표절의 기준이거든요. 그런데 표절이냐 아니냐, 이것만 묻고 논의가 끝나버리죠.
강수미
과거에는 비평을 시작하거나 소위 사회에서 발화의 주체로 등장할 때 아까 말씀하신 제도가 분명히 있었어요. 하지만 신춘문예와 같은 것들이 권위를 갖거나 기능을 가진 시대는 저물었어요. 지금은 그런 게 별로 없으니 젊은 세대들이 셀프 프로모션(self promotion)을 하는 거예요. 자기를 노출하고 시쳇말로 띄우는 데 타인을 희생자로 삼는 일도 드물지 않고요. 특정인을 비난하고 선정적인 사건을 터뜨리는 거예요. 그래서 토큰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속성상 옐로저널리즘하고 비슷하다고 봅니다.

저는 그런 방식으로 비평이 전개되어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항상 누군가가 문제를 제기합니다. 선정적이고 주목을 받게 되고, 거기에 따라 공론이 형성된다고 봐요. 문제는 그 형식이 아니라 지금 시대는 그 목적성이 개인의 출세에 더 집중되어 있다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개인적으로는 지적인 운동으로서의 비평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씀하신 내용 자체가 비평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것이 논의될 수 있는 장을 만드는 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강수미
사실 제가 작년 6월에 ‘비평 페스티벌’(페이스북, 2015 비평 Festival, www.facebook.com/CriticFestival)을 기획해서 3일간 했어요. 저의 주 목적이자 행사의 본질적인 성격은 ‘비평을 퍼포먼스 하자’였어요. 그래서 특별한 커리어가 없는 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경쟁 없는 공개 모집을 했어요. 작품 프레젠테이션을 원하는 이, 비평을 하고 싶은 이 모두 참여할 수 있는 열린 무대로요. 나중에 책(<비평 페스티벌1>, 글항아리, 2015. 11. 9)이 나왔어요. 그 책이 이를테면 3일 동안의 모든 일을 기록한 것이거든요. 비평 페스티벌 행사가 끝나고, 책이 출판되고 난 후 시간이 좀 흐른 연말에 이 일을 둘러싼 갈등이 인터넷상에 공개적으로 전개됐어요. 물론 그 갈등 상황에 제가 원인을 제공한 부분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비평이 지적 예술적 집합체의 다양한 수행성(performativity)으로 현실화할 가능성을 함께 실험하자고 비평 페스티벌을 공론장 형태로 열었는데, 참가자들은 개인의 이해에 입각한 발표장으로서 이를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그러면 이미 규모 자체가 안 맞잖아요. 일련의 일을 겪으며 어쩔 수 없이 비평 페스티벌에 대한 제 기획 방향도 보수화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습니다. 예컨대 ‘올해 비평 페스티벌은 전문가 중심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같은 것이죠.(웃음)
김소연
본인이 전문가 그룹의 폐쇄성에 갇히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웃음)
강수미
맞아요. 그래서 모순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상황이 저한테도 굉장히 딜레마더라고요. 문호를 개방하고 다양한 비평 행위를 실행할 무대를 마련했는데, 사람들이 여기에 사적인 차원으로 접근하니까 아귀가 안 맞으면서 문제가 파생되었어요. 이런 차원에서 비평의 새로운 역할이나 가능성이라는 것은 사실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김소연
비평가, 매체, 비평문이라는 틀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어쨌든 비평이 발생하는 형식이라든지 소통하는 방식에서 새로운 시도였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행과정에서 기획과는 다르게 문제들이 생겼겠지요. 비평 행위에서 중요한 것들을 던졌는데, 당사자들끼리만 얘기하다 보니 다음으로 연결되지 않는 거죠.

이런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김소연 사진김소연 연극평론가
1990년대에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고 그 의미에 대해 분석하길 즐겨 했듯, 작품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는 문화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김소연
저도 서울연극센터에서 연출가 토크를 기획해서 진행한 적이 있어요. 형식적으로는 요즘 유행하는 토크쇼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형식을 빌려서 작가, 작품에 대한 비평적 대화를 시도해보자는 의도였어요. 여전히 저 역시 비평문-매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다른 형식에 대한 관심도 크고 계속 시도해보려고 노력 중입니다.
제가 비평의 위기를 얘기할 때 항상 예로 드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영화의 전성기는 1990년대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때는 평범한 영화 관객들이 영화 잡지에서 영화평론을 찾아 읽고 요즘 자기계발서 읽듯이 영화사 책을 읽고 그랬어요.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름대로 분석하고 의미를 찾아보고 그런 수다를 떠는 거죠. 그런 걸 즐겼죠. 그런 게 비평 문화죠, 비평가가 글쓰는 것만 비평 문화가 아니라. 그런 비평 문화가 감싸고 있었기 때문에 창작, 산업에 활기가 만들어지는거죠. 영화 한 편을 보고 시간과 가격 대비의 만족도를 따지는 게 아니라, 재밌으면 왜 재밌는지 재미없으면 왜 재미없는지 그런 걸 같이 이야기하는 걸 즐기는 게 중요하죠.

정은경 사진정은경 원광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평론가
우리가 비평을 모색하는 이유는, 비평이 대중사회의 건강한 의사소통을 어떻게 할 것인지의 문제와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공론장을 형성해야 비평이 살아날 수 있습니다.

정은경
저도 공감하는 부분이 기획으로서의 비평, 각 작품에대한 텍스트 분석이 아니라 운동을 하는 것이에요. 담론을 주도하는 공론장을 다시 형성해야지만 비평이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신경숙 사태 이후 한국작가회의에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만, 출판사는 매체를 사유화하고 비평을 작품을 팔기위해 이용하니, 출판사 외에 어떤 공공기관이 공유지를 다시 만들고 비평의 공론장 회복을 모색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비평의 기원으로 저널리즘을 얘기하는 것은, 비평가는 공통 감각을 형성하고 판단 능력을 키워주고 일반의지2를 끌어가는 중요한 오피니언 리더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요. 저희가 비평을 모색하고 고민하는 이유는 대중사회의 건강한 의지 표출, 의사소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이라고 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기획이나 운동으로서의 담론 형성이 유일한 대안이 아닐까 하는 얘기에 공감합니다.
강수미
제가 드리고 싶은 답은 사고하고 표현하는 우리의 비평 행위에 지속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담론 자체가 지속되면서 그것이 융합되고 필터링되고 제3의 의미를 생산해내는 그 절차를 지속 가능하게 확보하고, 동시에 유연하게 변모시켜 나가는 일이 중요해요. 그러기 위해 비평을 완전히 다른 패러다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지요. 이제까지 비평은 창작의 후위에 있었고, 작품과 작가와 감상자 사이에서 중간자(mediator, vehicle) 역할을 자임해왔어요. 더 이상은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비평의 활동은 글쓰기만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이뤄져야 해요. 우리가 앉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도 사실은 비평이거든요. 비평의 지속성은 비평이 어디에서나, 언제나 일어날 수 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행위가 될 때 가능하고, 그것을 할 수 있게 하는 장을 만들거나 제도나 계기를 만드는 것이 비평가의 역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소연
지속성이 그런 것이죠. 열렸는데 그것들을 계속 연결해주는 것.

결론이 나온 것 같은데요. 가장 중요한 것은 비평의 담론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것인데요. 의견이 충돌하는 장 자체가 공론장일 수 있어요. 요즘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한데, 합의된 사람들끼리만 놀기 때문에 그래요. 이건 민간 영역에만 맡겨둘 수 없는 부분도 있습니다. 서울문화재단 같은 공공에서 장을 마련해준다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일단 부딪칠 수 있는 장을 많이 만들어야 하고 그 속에서 의견이 교환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장이 주어진다면, 다시 비평의 활성화를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화+서울

  • 1 [문화+서울] 2015년 6월호 p42~43, 이택광, “비평의 사막화를 다시 생각한다-우리는 잘못 생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 2 아즈마 히로키(東浩紀, あずま ひろき)는 저서 <일반의지 2.0>(아즈마히로키 저, 안천 역, 현실문화, 2012)에서 이전에는 하버마스식의 언론매체가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의견을 표출하는 중요한 장이었다면, 웹이라고하는 구글의 검색어 자동완성을 통해서 일반 사람이 각자 골방에 앉아 있어도, 일반의지, 전체의 여론을 읽을 수 있다고 낙관했다. 하지만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웹으로 각자 개인의 욕망을 표출한다고 일반의지가 완성되는 건 아니라며 폐기했다.
기획 이정연
서울문화재단 홍보팀 차장
정리 전민정
사진 장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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