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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1월호

골목, 서울의 모세혈관과도 같은 골목에 숨겨진 시간을 찾아서
골목은 길이면서 길이 아니다. 그곳은 바쁘고 정신없는 도시에서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위로와 치유의 공간이기도 하다. 개발보다 ‘재생’에 관심이 모이며 그간 허물기 일쑤였던 서울의 골목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는다. 골목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을까.

1 낙산공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이화동 골목 풍경.2 소제동 골목. 집과 집이 들어서며 자연스레 생기는 골목은 길이면서 길이 아니다.1 낙산공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이화동 골목 풍경.
2 소제동 골목. 집과 집이 들어서며 자연스레 생기는 골목은 길이면서 길이 아니다.

기억 속 골목과 유년시절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는 태어나서 14세까지 대전에서 살았다. 대동에 있는 대전여고 근처 골목이었는데, 내가 살던 집은 그 골목의 가장 끝에 위치해 있었다. 대부분 경사 지붕을 인 일층집들이 담장을 이웃하며 폭 2~3m의 골목을 형성한 곳이었다. ㄱ자의 막힌 골목 끝 집에서 보낸 어린시절의 기억은 이 골목길과 떼려야 뗄 수 없다. 당시 동이 트면 ‘새벽 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새마을 노래가 마을을 깨웠고, 이웃해 사는 어른들이 싸리비를 들고 나와 집 앞 골목길을 쓸었다. 골목길을 함께 청소하는 것이 동네 아침의 시작이었다. 그때는 동네에 변변한 놀이 시설이 따로 없어서 골목길은 우리들의 놀이터가 되곤 했다. 축구, 야구, 자치기, 구슬치기 등 모든 놀이가 골목 안에서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벌어졌다. 축구를 하다가 담장을 넘긴 공이 이웃집 유리창이나 장독을 깨부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그래서 매일 ‘다른 데 가서 놀아라!’라는 어른들의 꾸중을 들으면서도 다른 놀이터를 찾기란 여간 쉽지 않아,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슬금슬금 기어 나와 골목에서 놀곤 했다. 돌이켜보면 유년 시절 자체가 골목이고, 그 골목길이 곧 내 유년 시절이었던 것 같다.

골목의 비밀

골목은 길이면서 길이 아니다. 골목길은 그 곳에 사는 이들에게는 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집이라는 공간의 연장이자 생활공간 자체이기 때문이다. 골목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젊은이들에게는 호기심 어린 공간이요, 중장년층에게는 향수의 공간일 수 있다. 그네들의 발길이 북촌, 삼청동, 경리단길, 가로수길, 이화마을 등 서울 곳곳의 골목길을 찾고 있다. 왜일까?
사람은 그들이 머물거나 만나는 공간에 무의식적이고 심리적인 반응을 하게 된다. 높은 천장이 창조적인 일에 더 적합하고, 빨간 방이 파란 방보다 시간이 더 잘 간다는 느낌을 준다는 등의 실험 결과도 공간과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교감한다는 방증 중 하나다. 사람은 사람뿐만 아니라 공간, 그곳에 있는 기억 그리고 모든 존재와도 무의식적으로 교감하고 있다. 우리 삶 자체가 공간적이기에, 우리가 만든 공간이 우리를 닮아가고 동시에 우리 또한 그 공간을 닮아간다. 이것이 공간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비밀이다. 두 번째 비밀은 공간이 기억의 저장소라는 것이다. 특히 도시인의 집단적 기억이 스며있는 골목이 더욱 그렇다. 어떤 공간에서든 우리는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 경험의 강도에 비례해 그곳에 대한 인상으로 심상에 기억되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그곳에서 옛 기억이 담긴 흔적들과 다시 조우하면, 자신도 모르게 내면에 숨어 있던 잃어버린 시간과 추억이 되살아나 그 공간에 병치되어 드러난다. 이로써 이미 그 공간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시간과 기억이 병치된 다층적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간은, 어떤 곳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겹겹이 겹쳐 기억과 소망의 다차원적 교감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골목의 마법: 잃어버린 시간과 자아를 만나다

3 삼선장수마을 골목의 계단에 재치있게 그림을 그려놨다.3 삼선장수마을 골목의 계단에 재치있게 그림을 그려놨다.

서울 곳곳의 골목은 우리네 삶의 기억과 그곳 주민의 삶 자체를 가장 많이 저장하고 있는 곳 중의 하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도시의 장밋빛 청사진에서 소외되고 방치되었던 곳, 예전에는 흔하디흔했지만 이제는 그다지 남아 있지 않은 골목은 도시의 역사, 도시민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골목을 걷다보면 우리는 많은 존재와 시간을 만난다. 그곳 주민이나 낯선 호기심에 들뜬 젊은이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골목길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화초를 만나고, 담장 너머 빨랫줄에 걸린 옷과 옷 주인에 대한 호기심을 만나며. 나란히 걸려 있는 옷들을 빛내주는 화창한 하늘을 만나고, 골목을 따스하게 감싸 안는 빛과 그림자도 만난다. 또한 그곳의 오래된 흔적에서 자신의 옛 기억과 부모 세대의 과거를 만나기도 하고, 그래서 거기 던져있는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된다. 잃어버린 공간이 잃어버린 시간을 끌어내고, 잃어버린 자아를 마주하게 해주는 것이다. 이것이 세월의 흔적을 현재에 담고 있는 골목이 주는 마법, 공간의 또 다른 비밀이다. 물론 모든 이들이 이와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누구나 그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과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는 틈이 항상 열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서울의 골목에 변화의 물결이 서서히 몰아치는 듯하다. 가난해 서럽고 아프던 공간에서 왁자지껄 떠들썩한 활기의 공간으로, 추억과 회상이라는 애잔함의 공간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는 치유의 공간으로,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는 곳에서 젊은이들이 공존하는 곳으로 바뀌어가는 듯하다. 이러한 변화 속에 필경 또 누군가는 아파할 것이고 또 어떤 누군가는 기뻐하리라.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고 잊히며 사라지고 다시 그 층위에 겹겹이 또 다른 행복과 희망이 중첩되는 것이 우리네 삶이라면, 그것을 기억하고 저장하는 곳이 우리네 삶의 공간이자 우리가 사는 바로 이곳 서울의 또 다른 모습이다. ‘살아보니 인생 자체가 빛과 그림자이더라’ 라고 회고한 한 건축 거장의 글귀가 불현듯 스쳐간다.문화+서울

글·사진 명재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주)나무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www.namuarchitects.com)를 공동 운영하고 있다. 삶의 형식으로서의 이 땅의 민가와 풍경에 관심을 가지고 틈틈이 기록·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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