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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1월호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청계천 헌책방 거리’ 낡은 새것을 찾아
서울은 자고 일어나면 변하는 도시다. 새 점포가 들어선 자리에 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일은 다반사다. 높은 임차료는 이런 드나듦을 채근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개발의 행간에는 변화할 듯 변하지 않는 많은 것이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좀체 ‘서울 사람’이 되지 않는 예술사회학 연구자 이라영에게는 청계천과 동묘 근처의 헌책방 거리가 그런 곳 중 하나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 일러스트 이미지.

‘낡은 새 책’에서 흔적을 읽는 재미

십수년간 쌓인 여러 종류의 주간지와 월간지 등 잡다한 출판물 400kg 정도를 ‘버렸다’.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나의 20대의 흔적을 대거 처분하는 중이다. 그중에는 내가 쓴 글이 실린 잡지도 있지만 졸문에 너무 집착하나 싶어 차마 골라낼 시도를 하지 못했다. (무척 어렵지만) 살아온 흔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고 애쓰고 있다. 내게서는 버려졌지만 어딘가에서 다시 ‘활용’될 것이라는 믿음이 그나마 위안을 준다. 재활용센터에 팔았으니까. 관리 부실로 곰팡이가 생기고 책의 모양이 비틀어져서 헌책방에 팔기에는 부적절했다. 이제는 ‘폐지’가 되어 바닥에 나자빠진 그들을 보니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폐지를 주고 내가 받은 돈은 약 3만 원이다.
상태가 좋은 단행본들을 들고 조만간 청계천의 헌책방을 방문할 예정이다. 한국에서 프랑스로,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며 20번가량 이사를 해온 처지에서 물건을 소유한다는 건 상당한 사치가 되어버렸다. 구입 비용만이 아니라 소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필요하다. 가장 골칫덩어리는 언제나 책이었다. 그런데 그냥 버리긴 아까워서 헌책방에 책을 팔러 갔다가 다른 책들을 새로 사오기가 일쑤였다. 새 책이 가득한 서점도 좋지만 예전 주인의 흔적을 품고 있는 ‘낡은 새 책’이 쌓인 헌책방에 들어서면 희한한 마법에 걸린다.
흔적이 많으면 독서에 방해받는 면이 없지는 않으나 대신 책값이 더 싸고 엉뚱한 추리를 하는 재미를 준다. 최근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을 3권까지 읽었고 4권을 구하는 중이다. 주인공 시오리코처럼 책에 남아 있는 사인만 봐도 사건을 풀어갈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혼자 말도 안 되게 이야기를 만들곤 한다. 표지 안쪽에 남긴 메모가 특히 호기심을 자극한다.

서울에서도 유난히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헌책방’

나는 서울과 별로 친하지 않다. 아무래도 서울에서는 늘 집값에 허덕이다보니 내게 삶의 비용을 너무 많이 요구하는 도시로 각인되어버렸다. 그래서 서울에 거주한 시간이 적지 않음에도 스스로 ‘서울 사람’이 되지 못했다. 살아야 하니까, ‘거주’할 때가 있을 뿐이다. 그래도 서울에서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있다보니 한국에 거주하는 동안 서울은 포기할 수 없는 도시이기도 하다. 모든 도시가 그렇듯, 거주 비용이 비싸지만 대신 문화적으로는 풍성하다. 게다가 내가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그리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다양하게 누릴 수 있다.
너무 빨리 변해서 늘 ‘새것’인 서울에서 그나마 천천히 변하는 곳이 헌책방이다. 대학 시절에는 홍대 앞에서 「내셔널 지오그래픽」 과월호를 잔뜩 사거나 청계천 주변의 헌책방에서 두꺼운 미술 도록을 고르는 재미가 나의 낯선 도시 생활을 위로해줬다. 파리에 사는 동안에도 헌책방이나 벼룩시장을 통해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옛날 책을 구했다. 그러니 도시에 있으면 시골이 그립고 시골에 있으면 도시가 고프다. 바로 서울의 헌책방 거리가 내게는 종종 고픈 장소다. 가끔 내가 찾는 책이 없으면 주인에게 전화번호를 남기고 온다. 간절히 기다려보지만 아직 전화를 받은 적은 없다.
‘고물상’은 ’재활용센터’로 이름을 바꾸고, 도시의 미관을 해친다며 많은 재활용센터가 도시 주변으로 밀려나고, 재개발로 도시를 새롭게 바꾸느라 오른 땅값 때문에 스스로 도심을 벗어나기도 했다. 책의 고물상이라 할 수 있는 헌책방도 많이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다른 고물에 비하면 아직 도심에서 찾을 수 있는 편이다. 서울시의 조사에 의하면 현재 서울에는 100여 곳 정도의 헌책방이 남아 있는 듯하다. 대형서점과 온라인 서점에 밀려 작은 동네 서점들이 사라졌다. 예전만큼의 규모는 아니지만 인천의 배다리 헌책방 거리, 서울의 청계천과 동묘 근처의 헌책방 거리가 아직 유지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다행스럽다.

외국어와 택배 차량이 분주한 길 사이, 시간이 접힌 책의 거리

청계천 헌책방 가는 길의 풍경은 내가 발걸음하는 지난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꾸준히 변했다. 2000년 전후에 대형 쇼핑센터들이 들어서면서 동대문은 ‘패션의 메카’로 관광객이 많이 찾는 동네 중 하나가 되었다. 나도 옷을 사거나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이 늘어났으며 책은 점차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비중이 높아졌다. 동대문 주변이 복합 문화 공간이 되어가면서 나는 한동안 헌책방에서 멀어졌다. 그러다 한국을 떠나기 위해 책을 정리하다보면 또다시 헌책방으로 달려갔다. 그사이 ‘동대문운동장’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으로 바뀌면서 청계천 헌책방 거리로 가는 길은 훨씬 깨끗하고 세련되게 변했으며 귓가에 외국어가 더 자주 들린다. 근래에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지하철 택배 일을 하는 노인들이 잔뜩 모여 있는 모습을 보곤 했다. 저렴한 임금으로 노동하는 ‘나이 든’ 사람들이 새 물건을 배달하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얼마 전에 청계천 헌책방 앞을 지나가다가 「소년소녀세계명작문학」이 끈에 묶여 쌓여 있는 것을 한참 바라보고 왔다. 어릴 때 집에 놓여 있던 위인전이나 명작동화 같은 전집류도 중고 서적이 많았다. 중고로 사서 실컷 보다가 더 어린아이가 있는 다른 집에 줬다. “찾으시는 책 있으세요?” 왔다갔다 하는 내게 책방 주인이 묻는다. 내가 찾는 것? 기형도의 언어로 바꿔보자면, ‘내 유년의 아랫목’이 그 책 속에 있다. 문화+서울

글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부천문화재단에서 문화예술교육을 담당했고,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여성을 비롯해 모든 소수자의 역사에 집중해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그림 조성헌
대구에서 태어나 서양화를 전공했다. 현재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 중. 참여한 책으로는 국민은행 자산관리매거진 , 서울신용보증재단 매거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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