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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월호

원아영 작 정리
* <10분 희곡 릴레이>는 젊은 작가 혹은 지망생들의 재기발랄한 10분 단막극입니다.
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人에 가시면 더 많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webzine.e-st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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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옥의 집, 안방. 조명이 켜지고 순옥과 연우가 안방에 앉아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한다. 순옥은 장롱을 정리하고, 연우는 서랍을 정리한다. 순옥이 옷을 개다 말고 역정을 낸다.

순옥
썩을 놈.
연우
또 왜.
순옥
이제야 갔네. 이제야. 가라고, 가라고 해도 그렇게 안 가고 버티더니. 이제야 갔어.
연우
왜 또 그래. 아버지 들으면 서운하시게.
순옥
난 속 시원하다. 이 영감이 나한테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데. 그인간은 미안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었어.

순옥, 투덜거리며 장롱 정리를 한다. 순옥은 장롱 구석에서 무언가 집히는 듯 한참을 뒤적이다가 남성 속옷 하나를 꺼낸다.

순옥
(구깃구깃한 남자 속옷을 펼치며) 이것 봐! 속옷은 곱게 펴서 내놓으라고 누누이 얘기했는데 지린내 나는 팬티가 장롱 구석에서 나오잖아!
연우
아버지 거야? (웃으며) 그건 좀 화날 만하네.
순옥
느 애비는 맨날 이랬어. 소변 본 다음에 오줌을 꼭 한 방울씩 묻히고 다녔다고. 그럼 여기 가운데가 이렇게 누렇게 변해. 자기도 창피한 건 아는지 둘둘 말아가지고 숨겨놓고 그랬지. 하이고. 살면서 물 한방울 손에 안 묻혀봤으니 빨래할 생각도 안 한 거야. 뻔하지, 뻔해.
연우
자주 이랬어?
순옥
허구한 날 이랬지. 내가 잔소리하면 막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면서 욕을 하는데. 하이고, 말도 마라. 생각하기도 싫다. 자기도 창피하니까 그랬겠지? 아이고. 죽어서도 이런 걸 남기네. (속옷을 연우에게 던지며) 이건 태워버리자. 태울 거 한데 모아놔.
연우
태우면 저승에 이고 가는 거 아냐?
순옥
그렇지.
연우
이걸 이고 가라고?
순옥
가지고 가라고 해. 창피한 줄 알아야지.

연우, 속옷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 방구석으로 옮겨놓는다. 연우, 서랍 속에 있던 사진 하나를 집어 든다. 남편 옷을 개고 있는 순옥에게 가까이 가서 한 장의 사진을 건넨다.

연우
그래도 아버지 꽤 로맨티스트다?
순옥
(사진을 보며) 됐다. 치워라. 그건 어디서 꺼내갖고는.
연우
왜. 좋구먼.
순옥
뭔 놈의 사진이야. 딴짓 고만하고 좀 치워라. 넌 왜 놀기만 하고 나만 치우는데?
연우
잠깐 쉬었다 하면 되잖아.
순옥
됐다. 쉬긴 뭘 쉬어. 태울 빤스가 산더미야.
연우
(사진을 보며) 이야, 엄마 예뻤네. 머리 뽕 좀 봐. 이야. 미인이야, 미인?
순옥
어디 봐봐라.
연우
안 본다며?
순옥
내놔봐, 이것아. (사진을 본다) 하고. 이날 생각나네. 요 뽕이 그냥 뽕이 아니야. 구루푸로 30분 말고 있어야 나오는 뽕이지. 요 한 장찍겠다고 느 아버지가 카메라를 샀다. 좋은 걸로다가.
연우
이거 언제지? 나 군대 갈 땐가?
순옥
하이고, 답답아. 대갈빡이 있으면 좀 굴려봐라. 맨날 처물어싸지 말고. 너 단장 안 하고 디비져 누워 있다가 아버지한테 처맞은 날인데 그걸 그새 잊었어? 네 동생 대학 합격하고 서울로 기숙사 가는 날이었잖어.
연우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며) 아. 맞은 건 기억나는데.
순옥
그래서 식구들 죄다 모여가지고 앞마당에서 찍었지. 집안 경사라고 꽃단장한 거야. 아버지도 봐라. 남의 집 조문 갈 때나 입던 양복하나 꺼내갖고 입은 거. 하이고. 멀끔하기도 해.
연우
앞마당에서 찍는데 꽃단장할 필요가 있어?
순옥
(눈을 크게 뜨며 화난 표정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따라 하며)느 아버지가 눈을 요래요래 부라리면서 시키는 데 별수 있나. 그 인간이 딸 하나 있다고 얼마나 아꼈냐, 걔를. 미연이 서울로 대학 간다고 네 아버지가 그렇게 설레발을 쳤어. 이거 챙겨라, 저거 챙겨라 야단법석을 떨고. 아주 들들 볶았다고.
연우
그래. 나한테도 난리셨지. 막내는 장학금 타서 학교 다니는데 너는 돈 먹고 자라는 식충이 같다면서.
순옥
그래, 맞다. 그때 미연이가 장학금도 탔지. 너네 아버지가 그것 때문에 입이 한 달 동안 귀에 걸려 있었다.
연우
난 한 달 동안 구박받고.
순옥
미연이 가기 하루 전인가? 영감이 나더러 미연이 보내기 전에 포식시키라면서 돈 몇 푼을 쥐여주더라. 뭘 할까 하다가 삼계탕을 끓였어. 토종닭 네 마리를 잡아다가 푹 고아서 삼도 넣고 대추도 넣고. 딱 상에 올렸는데, 네 아버지 성격 드러운 거 알고 있지? 갑자기 눈이 번쩍번쩍하더니 그걸 다 엎어버리는 거야.
연우
아 그래! 이제 생각났네. 그래. 그 뜨거운 걸 휙 엎었었지.
순옥
왜 엎었나 했더니, 상에 고기가 없다면서 그런 거였어.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 서울 가는 날에 고기를 안 했다면서.
연우
닭고기는 고기 아니야?
순옥
네 아버지는 소고기가 아니면 고기 취급을 안 하는 사람이었다.
연우
하여간 아버지 성격 알아줘야 해.
순옥
그래. 그래서 미연이 고년이 뿔이 잔뜩 나서 새벽에 먼저 가버렸지. 인사도 안 하고 서울로 가버렸어. 밥도 못 맥이고 간 게 맘에 걸려서 나는 속에 천불만불이 나는데 너랑 네 애비는 아침이 되도록 늘어지게 처자더라.
연우
그 난리를 했는데 나도 처잤다고?
순옥
처잤으니 기억을 못하지, 이놈아. 그 피가 어디 가겠어? 결국, 딸내미 서울 가는 거 보지도 못했지. 자기 옳은 것만 알고 내가 하는게 죄 못마땅했던 사람이었어. 네 아버지라는 사람이 말이야. 그래서 아마 그날도 괜히 트집 한번 잡겠다고 그랬을 거다. 내가 그날 생각만하면 울화통이 터져서 잠을 잘 수가 없어.
연우
에이. 설마 그런 걸로 엎었겠어.
순옥
됐다. 말을 마라. 박가네 자식은 최가인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야. 영감탱이 죽은 후에도 그 인간 편을 들어? 그 인간이 나한텐 얼마나 박했는데.
연우
엄마도 똑같아.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까지 담배 한 모금 피우고 싶다고 그렇게 이야기했잖아. 그래도 담배 일절 못 피우게 한 건 엄마야. 곧 돌아가실 분인데 그거 하나 못 해줘?
순옥
느 아버지랑 똑같은 말 하지 말어라. 으휴, 꼴도 보기 싫어. 네 애비는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죽기 직전엔 토끼 같은 자식들이랑 여우 같은 마누라 생각이 나야지, 담배가 뭐야, 담배가. 네 애비가 그렇게 무드 없는 사람이었다.
연우
갑자기 무드가 왜 나와.
순옥
며칠 더 숨 붙게 해보려고 한 건데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이냐. (사이) 됐다. 됐어. 박가네랑 더 이상 말이 안 통해. 네가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박가네로 시집와서 매일 밤마다 밥상 엎어지고, 욕이란 욕은 다 먹었던 그 설움을 알어? 애들은 빽빽 울지, 남편은 빽빽 소리나 질러대지……. (개던 옷을 내려놓으며) 이것도 지긋지긋했는데 이제 끝이다 싶어서 잘됐지 뭐야.
연우
그렇다고 오늘까지 이렇게 툴툴거리기야?
순옥
가기 전에 마누라 손 한번 잡고 그간 미안했소, 내가 잘 챙겨주지 못해서 미안했소, 이렇게 하면 얼마나 좋아? 아니면 지 새끼들한테 덕담이라도 한마디 해주든가. 안 그러냐?
연우
아버지가 그럴 성격은 아니었잖아.
순옥
너도 참 그래. 왜 자꾸 네 애비 편만 들어?
연우
내가 언제 편들었어?
순옥
눈 부라리지 말어.
연우
내가 언제 눈을 부라렸어?
순옥
어디서 큰소리야? 하여간 지 애비 똑 닮아가지곤. 말대꾸하지 말어! 내가 영감한텐 당하고 살았어도 너한텐 안 당하고 살어.

연우, 대답하지 않는다. 순옥은 조용히 옷을 개고, 연우는 서랍을 정리한다. 침묵 속에서 순옥이 작은 목소리로 말문을 뗀다.

순옥
느 애비한테 가장 서운한 건, 처녀 적부터 지금까지 나한테 다정한 말 한마디 안 하고 이렇게 훌쩍 가버렸다는 거야. 단 한 번도 살가웠던 적이 없어. 하늘도 무심하지. 넌 모를 거다. 영감탱이 호흡기 달고 쌕쌕거릴 때 날 데려가주소, 하느님, 내가 먼저 가겠소, 했는데.
연우
…….
순옥
고왔을 때 손 한번 잡아주고, 어깨 한번 도닥여줬다면 이렇게 억울하진 않았어. 나이 먹고 늘그막에 아주 조금 살가워지나 싶었는데 이렇게 훅 떠나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때가 다 된 거라더니. 옛말이 딱 맞다, 맞아. 망할 놈의 영감탱이. 반성 많이 해야 돼. 지옥 불에나 떨어져라. 염라대왕님, 우리 영감 지옥 불에 담가주시오.
연우
엄마!
순옥
(사이) 너까지 나 나무라지 마라. 안 그래도 맘이 맘 같지가 않다.

순옥과 연우, 말없이 유품을 정리한다. 순옥은 다시 남편의 옷을 개며 장롱 속을 정리한다. 순옥은 남편의 유품이 나올 때마다 욕을 늘어놓고, 연우는 순옥의 눈치를 본다. 순옥이 다시 장롱 구석에 손을 집어넣어 뭔가를 꺼낸다.

순옥
하이고, 또 나왔다. 오줌 지린 팬티.
연우
누구 거야?
순옥
누구겠냐.
연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태워, 태우자.

연우, 속옷을 방구석으로 던진다. 순옥은 손에 사진 한 장을 꼭 쥐고 있다. 문화+서울

작가소개
<정리>의 작가 원아영은 1992년 여름, 마라톤 선수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금의환향하던 시기에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해는 서태지와 아이들과 그룹 넥스트가 동시 데뷔하고, 마광수 교수가 <즐거운 사라>로외설 혐의를 이유로 구속당한 문화사적으로 의미 있는 해였다. 그는 유년 시절 뒷산에서 썰매를 타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등 몸에 쥐가 노도록 놀이 활동에 심취했다. 201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극작과에 입학하고 난 후로는머리에 쥐가 나도록 지적인 활동에 열중하고 있다. 현재 학교를 쉬면서 사회의 쓴맛과 떫은맛을 느끼는 중이다. 글에 대한 ‘영감’을 주로 친할머니로부터 받고있으며, 이번 작품도 할머니를 떠올리며 썼다. 원대함과 아름다움, 영혼이 느껴지는 연극을 줄줄 선보이게 될 탈세대적 극작가, 원아영을 주목해주세영~
소개글 정진세 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인> 편집위원
글 원아영
그림 조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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