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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3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28절망의 고향을 찾아서

이경자 장편소설 《사랑과 상처》 표지 일부

하루하루가 점점 빠르게 느껴지는 나이가 됐다. 오감( 感)으로 확인되는 세상과의 이별이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인정하는 게 쉽지 않지만, 아니 몹시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생장쇠멸(生長衰滅)은 자연의 이치고 그래서 귀하고 아름다우며 존중할 가치가 있을 테니까.
그런데 이런 이치가 내 삶과 상관없다고 느끼던 때가 있었다. 이른바 젊은 날에. 아니 욕망이 부글거리던 때에. 나는 죽기 살기로 일했는데 왜 일하는지도 몰랐다. 현재를 성찰하지 않았다. 성찰하면 부끄러워질 테니까. 자연히 내 현실은 쓰지 않은 에너지가, 뭉친 지방질처럼 여기저기 덩어리졌다. 작업실에 나가 일하고 인세도 잘 들어오고 연재소설도 쓰고 책도 자주 냈다.
이런 어느 때였다. 마음이 허공에서 거처를 잃은 혼령처럼 방황하기 시작했다. 작업실을 처음 내고 지나치게 기뻤던것도 단물 빠진 과육처럼 시들해졌다. 1초라도 빨리 작업실로 가고 싶던 그 안달은 마음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집에서 나와 골목을 걷고 오른쪽으로 구부러져 경사진 길을 오르고 내려 중학교와 초등학교 사이로 빠져나가, 찻길을 건너 다시 골목과 골목을 골라 걷다 보면 한일병원과 건널목, 다시 건널목을 지나 지하도로 들어간다. 그리고 승강기 앞에 선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갇혀 있던 공기가 둔중하게 나를 덮친다. 벽에 가득 쌓인 책들은 죽은 허영심. 혁명·평등·자유 따위에 사로잡혀 사들였던 책들.
그때, 우울증을 앓았을까?
몹시 화가 나지만 그 화를 풀면 질서가 무너져 버릴 것 같고, 억울한데 억울함을 풀려면 일상의 관계들이 없어질 것같았다. 무당, 점쟁이, 교회, 나 나름으로 읽은 칼 융에게서도 희망이나 위로를 얻지 못했다. 아무렇게나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음반을 살피다가 선택에 실패하고 책상 앞에 앉았다가 일어서서 북으로 난 통창 앞에 바투 선다. 시선을 가로막는 삼각산의 웅장한 화강암 덩어리 인수봉, 만경봉, 백운봉. 곧 시선을 끌어당겨 앞으로 오면 가지가지 차들이 오고가는 길, 건널목에서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 길가의 간판과 상점들. 시선은 서둘러 직각으로 떨어져, 바닥에 널브러진 선명한 시신(屍身)에 부딪힌다. 죽은 나….
이런 극단적 심리 상태에 이른 어느 날, 부적 같은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원고지를 찢어 문장을 써서 책상 앞 벽에 붙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생을 이해하고 용서하면 내 삶이 평화를 얻을 수 있을까?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의자에 앉으면 눈높이에 있던 부적(符籍). 부적을 붙인 뒤로 길바닥에 널브러진 내 주검을 상상하지 않게 됐다.
나라는 생명을 만든 남자. 아버지는 누굴까. 아버지가 없으면 집안이 평화롭던 성장기. 그의 권위는 억압이고 폭력이었을까? 그리고 엄마. 엄마를 경멸하고 엄마를 닮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썼던지. 엄마는 대체 누굴까?
같이 살지 않기를 바라던 아버지, 닮을까 봐 지레 넌더리를 내던 어머니. 나라는 사람을 만든 두 사람. 나라는 생명 속에 이미 유전자로 존재하는 그들. 누굴까…. 바로 이 의문에서 내 존재의 신명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공부하기로 결심하면서 재활이 시작됐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서 그와 단둘이 마주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도 내 곁에 있지 않았다. 동생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신 어머니는 내 인생의 먼 섬이었다.
우선 아버지의 인생을 더듬기로 했다. 아버지의 성장기를 알고 있는 분들을 찾아다녔다. 그가 태어나 성장하던 시대. 일제강점기, 해방 공간과 전쟁, 분단과 냉전, 경제개발의 물질주의가 가져온 혼란 등등. 그의 자기중심적 가치관의 성립 과정과 생활습관엔 농경시대의 남아 중심, 장자 상속의 가족제도에 깃들인 유교 윤리가 있었다.
어머니를 공부했다. 어머니의 자매들, 친척들을 두루 찾아다녔다. 그리고 미국으로 가서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생긴 것을 다행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태어났을 때, 알지 못하지만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일들과 당신의 운명의 기둥을 만든 절체절명의 사건들을 이야기해 줬다. 내가 모르던 엄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으나 내면에 체(滯)한 상태로 박혀 비극을 만든 불행의 덩어리들. 어머니의 증언엔 그 시대가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그중에서도 남존여비(男尊女卑). 두 분의 삶에 삼강오륜의 전형이 보였다.
어머니와는 대개 저녁부터 잠들기 전까지 이야기를 했다. 가난한 이민자들을 상대하는 양품점에서 재봉틀로 옷을 줄여주는 일을 해, 몹시 고단할 터였지만 이야기를 멈추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이야기 중엔 놀랍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자신이 낳은 첫 번째 아이가 딸이었을 때의 공포감. 먹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아 피골이 상접한 딸이 겨우 백일을 넘기고 당신 품에서 숨을 거뒀을 때, 안도했다고! 여자로 사느니 죽는 게 더 낫다고!
…이런 공부 끝에 벽에 붙여놓았던 부적대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생을 이해하고 용서’하게 됐다. 그리고 장편소설 《사랑과 상처》를 썼다.
나를 사랑하는 것? 여전히 노력 중이다.

글·사진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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