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토르: 라그나로크> 헐크와 로키 피규어.
작은 부분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 피규어 작업
나는 작품 보는 것을 좋아해서 대학교 졸업 후 미술관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좋은 작품을 접하면 접합수록 내 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도 커져갔고 7년 전 피규어 회사에 입사했다. 새로 입사한 회사에서 피규어의 최초 원형(原形, prototype)을 만드는 일을 맡았다. 단순한 작은 고정형 트레이딩 피규어부터 완전 가동형 피규어까지 모든 제품들은 사람이 직접 스컬피나 목재 등의 다양한 조형재를 깎고 붙여가면서 만들어낸 원형에서 시작된다. 조금 생소할 수 있는 이 일을 하는 사람을 피규어 원형사라고 한다.
처음에는 베이스, 발, 손, 액세서리, 보디 작업과 복제 작업을 했다. 조소학과를 졸업했지만 피규어를 잘 알지는 못했기에 실력이 부족했고, 작은 부분부터 단계적으로 시작했다. 지금은 이렇게 피규어를 배웠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피규어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얼굴과 더불어, 작은 부분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인물을 6분의 1로 축소하는 작업이다 보니 생각할 것이 많았고 섬세함을 필요로 했다. 그만큼 더 멋진 영화 속 피규어 재현이 가능했다.
몇 년이 흘러 피규어 헤드를 만들 기회가 주어졌다. 얼굴 작업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작업하면서 조금이라도 놓치면 안 되는 부분들, 더 표현해야 하는 부분들로 인해 매번 선택의 순간에 놓였다. 최고의 선택을 위해 인체와 관련된 자료와 영상을 찾아보면서, 여러 가지 크고 작은 표정들을 어떻게 표현할지 연구했다. 배우 사진에서 모티브를 찾아 조각으로 담아내면서 희열을 느꼈다. 그 후 여러 헤드 작업들과 시행착오를 거치며 작업 시간을 조금씩 줄여갔고 덕분에 예전에는 보이지 않아서 못했던 부분들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작품을 마무리하면서 매번 깨닫는 것은 피규어는 여러 사람의 노력으로 탄생되는 하나의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얼핏 보면 한 명의 개인이 만든 듯하지만 피규어는 완성되기까지 많은 공정을 거친다. 헤드부터 디테일 파츠까지, 예술가들이 연구하고 고심해서 선택한 부분들이 하나의 작품에 녹아 있다. 그래서 더욱 값져 보인다.
3 <플래시> 피규어.
연구와 노력이 깃든 작품의 탄생
그동안 참여한 헤드 작업들로는 배트맨 아캄나이트 버전 얼굴 부분, 고스트 라이더, <토르: 라그나로크> 로키, 헐크, 발키리, <인피니티 워> 버키, <저스티스 리그> 배트맨 마스크 얼굴, <플래시>, <헬보이>, <어벤져스: 엔드게임> 캡틴아메리카, 토르 등이 있다.
조금 독특한 헤어스타일이나 모양을 한 피규어를 작업할 때는 종종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라그나로크의 로키 헤어는 블랙이었지만 긴 파마 형태의 머리 모양이라 신경을 많이 썼고, 깔끔하고 멋진 모습을 위해 손으로 많이 다듬고 붙이고 깎았다. 헤어스타일이 복잡하면 제작의 어려움이 많지만 제품이 나오면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것처럼 보람을 느낀다. 어려운 작업이 끝나면 조금 실력이 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 속 배우의 얼굴, 표정, 피부, 헤어스타일을 다 담아내야 하기에 노력에는 끝이 없다는 사실을 되새기곤 한다.
나는 멋진 피규어를 볼 때마다 경이로움을 느낀다. 작품들을 보고 구성을 알아가는 일이 너무 행복하다. 소비자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서 더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전 세계 많은 작가들이 피규어를 만들고 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작품들을 접할 때마다 감동을 느끼고 그 속에서 발전하고픈 욕구와 목표가 생긴다. 조금 더 사람 같고 자연스러운 표정과 느낌을 표현하는 방법을 연구하며 작업에 매진하려 한다. 많은 작가들 속에서 나만의 아이덴티티를 구현하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요즘 피규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감사하다. 내 밥벌이도 밥벌이지만, 같은 취미를 공유한다는 건 행복한 일이기 때문이다. 수집은 물론 제작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피규어를 제작하고 싶다면 피규어를 많이 사보고 분해해볼 것을 추천한다. 이론으로 배울 수 없는 작가의 고민이 피규어마다 녹아 있기 때문이다.
- 글·사진 제공 전연선_피규어 원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