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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1월호

국악 브라스밴드 시도 X Tory X 민수민정 〈연희하는 여자들〉 다시, 짙은 사랑과 생이 이어지는 소리

나는 무사히 살아남아서 언니가 되고 싶다. 내가 사랑해 온 수많은 여성 작가들, 우리 엄마와 친척들, 축제에서 만난 기획자들과 인턴 시절 나를 이끌어준 팀장님처럼 멋진 언니가 되면 좋겠다. 새삼 언니라는 단어가 얼마나 다정하고 소중한지 생각해 본다. 차별과 혐오라는 연기가 뿌연, 나보다 더 거친 과거의 세계를 살아낸 언니들은 존재만으로도 큰 용기다. 그리고 또 다른 언니인 당신을 만났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 ‘언니’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멋있으면 ‘언니’라고 하지 않던가.) 당신은 ‘연희하는 여자’로 이 자리에 섰다.

“언니 생각이 나, 가끔. 사실은 내 생각을 하는 거겠지.”
 당신은 덤덤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떻게 연희를 시작하게 됐는지, 얼마나 기뻤는지. 당신의 언니들도 영상으로 이야기한다. 흐릿한 화면 속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 당신의 얼굴에서도 빛이 인다. 그 기쁨을 보여주듯 당신은 ‘판굿’을 선보인다. 그러나 신명은 잦아든다.
당신은 앞으로 잔인하고 가혹한 선택을 해야 한다. 당신의 언니들이 그러했듯이 연희라는 당신의 생과 일상, 그리고 앞으로 생겨날 가족 사이에서 말이다. 30대를, 40대를 넘긴 여성 연희자는 출산을 기점으로 사라졌다. 평생을 연습한 실력이지만 몸을 쓸 수 없는,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공백기는 고스란히 경력 단절로 이어졌다. 그들은 임신 이전보다 떨어진 체력, 육아로 인한 연습량의 부족 때문에 무대에 설 수 없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나는 괜히 화가 나서 생각했다. 그건 임신, 출산, 육아를 선택한 언니들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여성 연희자를 무대에 세우지 않는 세상 때문이라고. 당신의 능력과 노력을 쉽게 대체하기로 결정해 버리고 아무렇지 않게 무대를 지속하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그러나 나의 분노와 다르게, 화면 속 목소리는 단지 무대가 너무 그립다고 말한다. 무대 위의 기쁨과 환희, 거기서 받는 에너지까지 연희는 그들의 일상이었고, 평생 해온 ‘일’이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오래 공연하고 싶다는 꿈을 꾸며 연희는 자신이 죽을 때가 돼서야 그만둘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자신의 일을 얼마나 사랑해야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 가늠할 수 없는 연희에 대한 단단한 사랑에 분노는 사라지고 어떤 먹먹함만이 남았다.
임신, 출산, 육아를 최대한 뒤로 미뤄야 할 것만 같다고 말하는 당신에게서 어떤 두려움과 막막함을 본다. 탈진하듯 ‘Prayer’를 공연하는 당신의 마음을 짐작한다. 언니가 없어도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는 이곳, 아무렇지 않은 이곳이 당신에겐 고민이 아니었을까. 열심히 잘한다고 해서 평생 연희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며, 그 끝이 너무나도 명확해 보인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당신은 고민한다. 그리고 그런 당신 곁에서 연희자가 아닌 나도, 내 생각을 한다. 단지 연희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나를 낳고 일로 돌아가지 못한 엄마를 생각하고, 아빠가 일하는 회사에서 단 한 명뿐이었던 여성 부장님을 생각했다. 아이를 가짐과 동시에 일을 하지 못했거나 많은 제약을 받았던, 가까운 여성들을 떠올린다. 우리는 함께 고민하기 시작한다. 또 다른 음악이 시작된다.

〈연희하는 여자들〉 공연 현장

“내일도 우리가 무대에 설 수 있을까?”
 당신이 선택한 것은 지금 연희하는 것이다. 당신의 음악은 때로 애절하고 단호하며 신이 나고 화려하다. 그 모든 곡을 관통하는 것은 힘이다. 당신과 언니들의 말 사이사이에 들리는 음악은 어떤 선언 같다. 이렇게 좋은 음악을 하고 있다고, 이렇게나 잘하고 있다고 증명해 보이듯 연주한다. 추임새를 넣거나, 뒤에서 훌쩍이기도 하는 관객들의 소리를 들으며 이곳에 앉아 있는 모두가 당신의 음악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연은 많은 이야기를 담은 듯하면서도 사실 단순했다. 여성 연희자인 당신의 팬이 되게 만드는 것, 그래서 당신이 음악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길 바라게 하는 것이다. 공연은 관객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이 당신의 연희를 기다리고 있다면, 어떤 세상과 상황이 그를 배제할지언정 그 신명 나는 소리와 움직임은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공연의 마지막 부분, 무대 위 하얀 천에는 언니들이 아닌 당신의 동생이 있다. 10대의 여성 연희자가 죽을 때까지 연희를 하겠다고 다짐하듯 말한다. 마지막 곡 ‘아리아리’는 가장 화려한 소리로 대답한다. 너희들이 평생 연희할 수 있도록, 우리가 계속 좋은 연희를 해나가겠다며 시선을 주고받는다. 그게 얼마나 든든한 소리인지 객석의 동생인 나도 힘을 얻는다. 미소가 번진다. 아, 나도 힘을 내 언니가 돼야겠다.

김유경_쉼표가 많은 글을 씁니다. 한 권의 책을 만들고 잠시 에디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다정하게 읽는 눈을 가지고 싶어 공연을 열심히 보고 있어요. | 사진 안수민

※본 원고는 지면 관계상 편집됐습니다. 원문은 웹진 [연극in]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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