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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1월호

임상수 감독의 〈파로호〉 지옥에서 보낸 한철

※칼럼의 제목은 랭보의 동명 시에서 인용했습니다

〈파로호〉(2022) | 감독 임상수 | 출연 이중옥(도우), 김대건(호승), 김연교(미리), 변중희(이순), 강말금(혜수)

인생이 내 두 손을 꽁꽁 묶고서 내 앞에 물잔을 들고 서 있다. 안절부절못하는 나에게 인생은 언제나처럼 친절하지 않다. 곧 나를 향해 끼얹어 버릴 것 같은 그 물 한 잔이 얼음처럼 차가울지, 화상을 입힐 만큼 뜨거울지 알려주지 않는다. 한순간도 대충 살아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인생은 나를 심판하러 온 악마처럼 나를 억울하게 하고 나를 위협한다. 그래서 불안하고 불편해지고 만다.

삶이라는 지옥

도우(이중옥)는 시골 모텔에 갇혀 치매 환자인 어머니를 돌보고 있다. 마을 사람들에게 효자라고 칭찬받지만 어느 날 노모가 실종되자 사람들은 그를 의심한다. 단골 미용실의 원장(강말금)만 그의 편을 들어준다. 어느 날, 정체불명의 남자 호승(김대건)이 나타나 이상하게 그의 생활 속으로 파고든다. 알고 지내던 다방 종업원(김연교)은 갑자기 그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임상수 감독은 첫 장편 데뷔작 〈처녀들의 저녁식사〉로 제51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 최대 섹션인 하버(Harbour) 부문에 공식 초청받았고, 국내 개봉 전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 진출하면서 호평받았다. 영화 〈파로호〉는 지옥에서 한철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 주인공 도우를 통해 억울하고 답답한 인생의 불친절함을 고개 돌리지 않고 바닥까지 들여다본다.
임상수 감독은 인생이 발을 걸어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 도우의 인생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신은 인간에게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준다는데 도우의 고통은 한계에 다다른다. 도우의 삶처럼 영화의 이야기가 뒤틀리면서 선과 악의 경계가 꼬인다. 똬리 틀고 얌전히 숨어 있다가 갑자기 독이 든 이빨을 드러내는 독사처럼, 사람들은 평범한 표정 뒤에 잔인함을 동그랗게 숨겨두고 있다.
도우가 자신과 어머니의 삶을 의탁하고 있는, 허허벌판 위의 모텔은 점점 무너지고 있다. 뜨내기손님이 잠시 머물다 가는 낡은 호텔은 사람의 온기가 없어 차갑다. 균열이 생기고 고쳐도 다시 물이 새는 낡은 천장과 파이프는 달아날 수도 없고 수선할 수도 없는 도우의 인생을 상징한다.

외로움이라는 지옥

강원도 화천의 실제 호수인 ‘파로호’는 1944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만든 댐으로 인해 생긴 대한민국 최북단의 인공 호수다. 영화 〈파로호〉는 군사 접경지역이라는 실제 장소가 품고 있는 서늘한 폭력성 속에 현재의 삶을 사는 인물의 달아날 수 없는 삶을 가공해 넣는다. 희망이라 불리는 자기기만에 빠질 시간도 없이 절망적이고 외로운 삶을 사는 주인공 도우를 통해 영화는 삶과 미약한 희망 그 자체를 조롱한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밝힐 수는 없지만 도우와 호승 사이의 비밀은 관객에게 현재 우리의 시간이 담고 있는 공포를 재현한다. 외로움이라는 지옥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소름 끼치는 반전을 품고 있지는 않지만 곱씹을수록 으스스한 느낌을 준다.
임상수 감독은 욕심을 내 힘을 주는 대신 찬찬히 인물의 속내를 들여다본다. 그는 플롯을 교란시켜 팽팽한 긴장감을 만들지만 반전과 극적 스릴을 위해 이야기를 희생시키지 않는다. 선인과 악인의 경계가 무너져 있기에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응원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교감할 수 있는 영화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저열한 삶이 바로 당신의 모습과 닮았다고 말하며 악의를 체험하게 만든다.
영화 〈파로호〉는 지옥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묻는다. 과연 삶이 나를 짓누르고 달아날 수도 없게 발목을 붙잡고 잔인하게 괴롭힐 때, 누군가를 밟고 서지 않으면 하염없이 가라앉는 진창 속에 있을 때, 자기 자신과 타인을 해치지 않고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질문 앞에 선 사람이 누구든지 묵직한 이 질문에서 가볍고 경쾌하게 달아날 수는 없을 것이다.

최재훈 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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