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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1월호

눈에 보이는 사랑

〈쓰다〉 58호 포스터

작은 것에 진지할 수 있었던 시절을 떠올리면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다. 아이들은 뒷면이 먼지로 범벅이 되어 더는 스티커 기능을 하지 못하는 작은 그림 조각을 서로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고 또 그걸 며칠이고 몇 달이고 간직하며 귀하게 여기기도 한다. 귀여운 그림 위에 비닐이 덮인 종이 조각의 가치는 여러 친구 가운데 다름 아닌 자신에게만 그것이 주어졌다는 데 있다. 별다른 쓸모를 찾기 어려운 스티커를 손에 쥐고 아이는 자신이 선택된 사람이라는 사실에 기쁨을 느끼며 뿌듯해한다. 그런 순박하면서도 깊은 감정은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지나면서 우리는 단순한 사랑이 선사하는 즐거움을 외면하고 훨씬 더 복잡한 방식을 통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려 한다.
최근 일반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프로그램이 인기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이 리얼리티 연애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요즘 방송은 이삼십 대 미혼 남녀의 관계를 다루는 것을 넘어 이혼 경험이 있는 사람끼리의 연애나 헤어진 연인이 마구 뒤섞인 상황에서 새로운 관계를 찾아가는 과정 등 다양한 상황을 TV로 내보낸다. 이런 방송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자극적이라는 데 있을 것이다. 사랑에 얽힌 출연자의 사연과 감정이 복잡할수록 새로운 관계 안에서 풀어갈 이야기가 많아지고, 저들의 순탄치 않은 서사에 이입해 시청자가 떠들 수 있는 요소도 많아진다. 한 사람이 관계 맺는 방식과 사소한 선택이 전부 논란거리가 되며 시청자의 논쟁에 논쟁이 덧붙는 것에 힘입어 방송은 방송 바깥에서 점점 더 자극적인 것이 되어간다. 그럴수록 단순한 사랑이 지닌 미덕은 더욱 어리석은 것으로 치부될 것이다.

고주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고주호의 목소리가 엄청 중요해지고 말았다. 보통 변성기를 지나가는 애들 목소리는 꼭 꼬집힘당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면 깨물림당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근데 고주호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잔잔하고 고요한데, 넓게 퍼졌다. 나는 이번에도 고주호가 주워준 지우개를 건네받으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다음은 수학 시간이었다. 틀린 답을 고쳐 쓰느라 고주호가 주워준 지우개로 필기를 박박 지우는 바람에 책상이 더 흔들렸다. 어김없이 흔들리는 책상 위에서 샤프 하나가 데구루루, 구르기 시작했다. 귓가에 여기, 하고 넓게 퍼지는 고주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한 번만 더 들어보면 내 이상한 마음이 무엇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인송, 〈굴러가, 사랑!〉 중

동화 특집을 시작하며 자연스레 기대한 주제는 ‘성장’이었다. 아이들이 겪는 거의 모든 일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법 없이 아이들을 건드린다. 그래서인지 일상의 어떤 사건이 아이들의 어떤 마음을 얼마만큼 자라게 하는지를 일곱 명의 작가가 어떤 시각으로 바라볼지 궁금했다. 그 가운데 어린이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강인송 작가의 작품을 읽고 머릿속에 청명한 바람이 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주인공 서현은 어린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의 가정사를 겪었다. 하지만 서현과 서현의 가족은 그 문제에 짓눌리지 않는다. 그저 더 명랑하고 단순하게,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이겨내고 있다. 분명 무너지기 직전까지 갔을 서현의 마음이 끝내 무너지지 않는 건 그런 가족들의 노력 덕일 것이다. 전학을 간 학교에서 서현은 다리 한쪽이 짧아 흔들리는 책상을 받게 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필기구가 기울어진 책상 위를 굴러 바닥으로 떨어지지만 그때마다 주호는 재빨리 움직여 물건을 주워준다. 주호는 반에서 알아주는 느림보다. 다만 서현에 대한 마음이 그를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이도록 만들 뿐이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필기구처럼, 서현의 마음은 수시로 떨어지며 바닥을 뒹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 건 서현에게 주호가 있기 때문이다. 밥상을 차려주는 작은아버지와 잔소리로 걱정을 보태는 작은어머니의 다정한 손과 입도 있다. 강인송의 작품은 단순한 사랑이 지닌 미덕과 영향력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사랑 이야기가 동화 속에 담겨 있다.

김잔디_[비유]편집자 | 사진 웹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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