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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월호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라스트 나잇 인 소호> 여성, 복고의 거짓말을 지우다

오래된 물건을 파는 가게를 지날 때면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 낡은 물건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묻어 있어 빙그레 웃게 된다. 희한하게 과거는 몽글몽글 뭉쳐 있는 구름 같아서 뛰어들면 폭신폭신하게 나를 감싸줄 것 같다. 그래서 마치 과거의 그 시절엔 고민 하나 없던 것처럼 속게 된다. 사실 지금보다 무지하고 폭력적인 시절 탓에 사람들은 꽤 아팠다. 노스탤지어만 매끄럽게 남겨놓은 그 복고가 지운 것은 시절 속 흉터다.

도시, 여성, 괴담

영국의 시골 마을에서 디자이너를 꿈꾸는 엘로이즈(토마신 매켄지)는 런던의 패션 학교에 진학한다. 엘로이즈의 기대와 달리 기숙사 친구들은 그녀를 촌스럽다며 무시한다. 엘로이즈는 콜린스 부인(다이애나 리그)이 관리하는 낡은 방 하나를 구해 기숙사를 탈출한다. 그 방에서 잠이 들면 1960년대 화려한 소호의 밤과 가수 샌디(안야 테일러 조이)의 꿈을 꾸게 된다. 엘로이즈는 꿈속 샌디와 교감하면서 점점 그녀를 닮아 간다.
영화가 시작되면 주인공 엘로이즈는 신문지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1960년대 레코드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방에는 모델 트위기와 배우 오드리 헵번의 사진이 걸려 있다. 마치 1960년대가 배경인 것 같지만 사실 현대의 영국이다. 시골에서 엄마 대신 할머니 곁에서 자란 엘로이즈는 할머니의 영향으로 복고의 정서에 푹 빠져 있다.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시골 소녀가 도시의 예술학교에 진학 후 겪는 심리적 두려움을 공포의 방식으로 풀어낸 다리오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1977)를 연상시킨다. 들뜨고 행복한 마음으로 런던에 도착했지만 처음 만난 택시 기사는 불쾌한 시선과 말로 엘로이즈를 불안하게 하고, 기숙사의 소녀들은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낸다. 홀로 생존해야 하는 여성에게 도시는 불친절하다. 선인장처럼 뾰족한 가시를 드러내고 곁을 주지 않는다.

낭만을 지우고 사람을 읽다

복고는 꽤 오랜 시간, 일상에서 익숙한 단어가 됐다. 살짝 비틀어 보자면 팍팍한 현실을 과거의 낭만적 기억으로 묻으려는 현실도피로 읽히기도 한다. 그래도 여전히 복고의 감수성이 전달하는 따뜻한 위안의 힘은 치유의 순기능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복고는 감수성의 외피와 내면이 다르기 때문에 부서지기 쉬운 정서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달콤한 추억이지만 그 시절이 지긋지긋한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복고를 이용한 이야기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시대를 이해하고, 그 시간의 사람과 그들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진정성이다.
에드거 라이트 감독은 빠르고 감각적 연출로 시작부터 쉬지 않고 달린다. 그리고 폭력의 시대에 희생당한 샌디와 편견과 위협에 맞서 성장하는 엘로이즈의 이야기를 이음새 없이 매끈하게 봉제한다. 거울로 두 여성이 서로를 마주 보고 분열된 인물들이 교차하며 하나로 이어지는 장면은 현기증이 날 만큼 유려하다.
사이키델릭한 화면이 가볍게 날아다니지만 이야기는 진지하다. 꿈을 빼앗기고 착취당하는 여성을 괴담이 아닌 진짜 이야기에 담아낸다. 그리고 여성의 갈등과 반목이 아니라 교류와 이해, 그리고 화해를 중심에 둔다.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지만 마치 거울처럼 서로를 반영하는 토마신 매켄지와 안야 테일러 조이는 마치 지퍼처럼 서로의 톱니를 단단하게 맞물린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는 레트로 팝 문화에 대한 감독의 애정을 담고 있지만 노스탤지어만 매끈하게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그간의 대중문화와 다른 방향을 향한다. 그는 쇼 비즈니스 속에 유령처럼 떠돌던 폭력의 시간을 기억한다. 그래서 시대에 희생당한 한 여인의 이야기는 단순한 공포 그 이상의 흔적을 남긴다. ‘공포’ 장르 영화는 이렇게 세기에 한 번씩 큰일을 친다.

<라스트 나잇 인 소호>(2021)

감독 에드거 라이트

출연 토마신 매켄지(엘로이즈 역), 안야 테일러 조이(샌디 역), 다이애나 리그(콜린스 부인 역)

최재훈 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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