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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0월호

엄마를 바라보는 엄마

웹진 [비유] 45호의 <쓰다> 포스터

요즘 같은 시대에 책을 좋아한다는 게 얼마나 괴상한 일인가. 어려서는 독서가 수상한 취미라고 한 번도 의심한 적 없는데 요즘은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읽으면서 내내 즐겁지도 않고, 분명히 한글로 적혔는데도 독해하지 못할 때는 괴롭기도 하다. 하지만 즉각적인 기쁨을 보장하는 수많은 콘텐츠를 뒤로하고 나는 보통 책을 선택한다. 독서란 오롯이 혼자 되는 일이다. 책은 이곳과 다른 저 바깥에 세상이 있음을 보여주는 대신, 나 홀로 존재하는 ‘지금-여기’를 잠시나마 긍정하게 만든다. 그게 약이 된다. 집중 할 만한 좋은 글에 빠져 있으면 그런 아름다움을 알아보며 즐기는 내가 좋아진다. 소설 한 편, 시 몇 구절이 자존감을 지켜주는 때가 있다.
멋지게 읽어낼 자신이 없어서 리뷰로 시를 다루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오늘은 마음먹고 시를 소개 해 보려 한다. 시 텍스트 위에 내가 아는 한 사람의 얼굴이 완벽하게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그와 처음 연락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그를 아끼고 존경하게 됐다. 그와 나는 종종 선물을 주고받고 심지어 어디서 좋은 시를 읽으면 보여주기도 하는, 어떻게 보면 좀 이상한 관계다. 그는 신생아집중치료실에서 일하는 의사다. 1kg도 안 되는 무게로 태어난 아기들을 밤낮으로 보살피는 일을 한다. 퇴근하면 천근만근인 몸을 씻고 늦은 시간까지 자신을 기다린 자식들 옆에 겨우 머리를 떨어뜨리지만, 병원에서 호출이 오면 다시 일터로 향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 일상을 깎아내면서까지 살리려고 노력한 아이가 모두 건강하게 퇴원하지는 못한다.
그는 늘 자기 삶이 위태롭다고 느낀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확신해서가 아니라 그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으로, 좋은 시와 그를 나란히 놓아도 괜찮을 것 같다.
그는 시를 읽으며, 문장과 문장 사이의 행간 속에서 자기 마음을 찾으려는 사람이다. 자기처럼 생각하고 자기처럼 느끼는 시인을 만나면 위로받는다 말했다. 그는 임승유 시인의 첫 시집을 좋아한다.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에 적힌 시인의 말은 다음과 같다. “다음엔 내가 너의 아이로 태어날게.” 자기 삶 전체가 자신이 돌보는 아이의 표정과 몸짓으로 인해 때로는 앞으로 잘 나아가기도 하고 완전히 흔들리기도 하는 그런 사람에게, 저 문장이 대체 어떤 감수성을 불러일으켰을지 내내 궁금했다. 얼마 전 임승유 시인의 다음 시를 보고 그를 또다시 떠올렸다. 이 시가 온통 그의 생활 같기만 했다. 달리 해석할 수 없어서 막막했지만 그래서 더 깊이, 더 오래 읽을 수밖에 없었다.

뒷문을 열고 나간 것까지는 기억해. 문득 정신 차려 보니 소철 나무 앞에 앉아 있더라고. 내가 아는 소철이었어. 키운 지는 몇 년 됐고. 시간이 좀더 지난 후에는 소철이 아니라 푸른 이끼로 뒤덮인 돌멩이라는 걸 알게 됐지. 생명력으로 가득한데다가 부드럽고 축축해서 손바닥으로 쓸어도 보고 고개 숙여 냄새를 맡기도 했어. 동작을 반복하는 동안 나는 점점 견딜 수가 없었어. 뭘 더해야 이 푸른 것 옆에 있게 될까. 한번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까 이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한 게 없고 이런 나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거의 울먹이는 심정이 됐을 때 멀리서부터 해가 비치기 시작하는 거야. 새들이 나무와 나무 사이로 옮겨 다니느라 온통 시끄러웠어. 여기서 뭐하세요? 아이 손을 잡고 서서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어. 소매가 긴 푸른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었더라고. 지금 막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주변의 다른 생물이 그러하듯 저기 해가 비치는 지평선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지. 두 사람이 뒤에 있다고 생각하니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겠더라고. 지금 생각해도 신통한 건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이야.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끼 앞에 쪼그려 앉아 있던 내가 어떻게 됐을지 누가 알겠어.
임승유 <소매가 긴 푸른 셔츠에 검정 바지> 전문

이 시를 그에게 보냈더니 한참 대답이 없다. 그는 시를 천천히 읽고 싶어서 급히 차를 몰아 한강 공원에 갔다고 한다. 출퇴근길 바라보던 한강 공원에 가보는 것이 며칠 전부터 벼르던 일이라고 했다. 초저녁부터 유난히 밝았던 달 아래 쪼그려 앉아 시를 여러 번 읽었다고 했다. 그를 수시로 절망하게 하는 사건이 무엇이든, 그 절망감을 느끼며 쪼그려 앉아서도 그는 항시 ‘두 사람’을 마주해야 한다. 아픈 아이와 아이의 엄마. 그래서 그는 한탄과 후회를 하며 계속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두 사람’이 매번 그를 다시 일으키고 만다.
실제로 매일 병원에서, 그는 엄마와 그 엄마 손을 잡고 선 아이 모습에서 힘을 얻는다. “저도 얼마든지 나아갈 수 있겠죠?” 그가 물었다. 나는 그의 그런 말들이 자기 등을 더 떠밀어 달라는 문장으로 읽힌다. “계속 나아가고 계시잖아요.” 임승유의 시를 읽으면서 그가 어떤 마음으로 계속 나아가는지 나도 아주 조금은 짐작하게 됐다.

김잔디 [비유]편집자 | 사진 제공 웹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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