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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264동 304호의 나팔꽃, 희숙 씨

어느새 할머니가 된 우리,
그 산길로 올라가는 희숙 씨를 뒤에서 찍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이들이 막내일 경우 유치원이나 다녔을까요? 그런 아이들을 둔 엄마로서 현대빌라에 함께 살았어요. 희숙 씨는 3층, 나는 1층에.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이 많지만 같거나 비슷한 것도 꽤 됐지요. 우선 동갑내기 쥐띠로 희숙 씨는 여름 쥐, 나는 봄에 태어난 쥐, 딸만 둔 것도 같았어요. 아이들은 집 근처 같은 학교에 다녔고요.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된 뒤에 어떤 이유로 나는 거의 홀연하다 싶게 그곳을 떠났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내가 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그 시절에 대해 반성도 하고 감사도 하고 싶어서입니다.
희숙 씨는 내 처지를 잘 이해하는 편이었어요. 소설가란 직업에 대해서. 특히 혼자이길 원하고 혼자여야만 하는 직업의 특성을 잘 이해해 줬어요. 내 시간이나 능력은 그 나이의 여성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은 좀 복잡하고 흔치 않았으며 독특한 편이었지요. 겉으로는 평범한 생활인데 내면의 자기 세계는 지켜내야 하니까 마치 용량이 초과된 기계처럼 망가지기 직전의 소리나 표정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불만으로, 경계심으로 가득 찼었을 내 얼굴. 이웃을 만나면 형식적 인사는 잘 하지만 눈은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면서 마음을 감추는 태도는 거의 본능 같았을 겁니다. 타인을 마음에 담지 않으려는 필사적 방어!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하여튼 양손에 떡을 욕심껏 들고, 그 떡을 미워하는 형국이었다고 할까요?
겉으로는 화려하고 속은 황폐하던 때. 나 자신을 때리고 욕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가득한데 그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을 모르니 만만한 아이들에게나 분풀이를 하던 엄마라는 소설가. 누가 소설을 쓰라고 떼밀지도 않는데 혼자서 늘 소설이라는 이름의 ‘다른 인생과 다른 시대’를 마음에 품고 그 마음속의 사람들과 시대를 상상하고 그들의 희로애락에 빙의되던 때.
이런 분열적 생활이 더 계속됐다면 지금쯤 이 세상에 없거나 정신병원에 있지 않을까요?
딸이 학교에서 반장을 한다면 못 하게 하고, 그래도 하면 부반장 어머니에게 부탁해서 반장 어머니의 일을 도움받고. 그즈음 정말 글을 많이 썼어요, 미친 듯이.
그런 중에도 희숙 씨, 여기에 쓰는 게 맞나 망설여지긴 하는데, 희숙 씨는 나를 조금 이해하는 것 같았어요.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어요. 어느 날 아침, 밥이 부족하면 3층에 올라가 문을 두드리거나 전화로 밥 좀 달라고 한 게 열 손가락으로는 셀 수 없지요. 반찬도 자주 내려보냈고요. 그럴 때마다 희숙 씨는 마치 친정어머니처럼 밥을 줬어요. 고향에서 가을이면 쌀가마니가 오는 집의 주부이기도 한 내가 아침에 밥을 얻으러 가는, 불균형한 살림살이 사정을 희숙 씨가 이해했던 겁니다.
이런 나. 가슴에는 분노와 울분과 슬픔이 가득했는데 이 차갑고 딱딱한 감정을 덜어내려고 집 근처의 산을 오르내렸습니다. 내 목숨이 살아남고자 하는 나름의 전략이었다고 이해는 합니다. 산을 오르는 일은 참 신기해요. 누군가를 미워하고 무언가를 증오하면서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이 맑아진 걸 느끼게 됩니다. 순식간에 찾아온 평화! 나는 그쯤에서 산등성이의 어디일 나무 그루터기나 바위에 주저앉습니다. 비로소 건너편 진달래능선이, 그 위로 대동문이, 대동문 위로 동장대에 이르는 산등성이가, 더 가면 노적봉, 만장봉, 위문과 백운대와 인수봉을 느끼고 상상하지요. 그 눈길은 발아래로 돌아와 자잘한 돌멩이, 풀과 산꽃, 여러 가지 나무들과 교감을 시작합니다. 교감 중에 마음에 감기는 가장 큰 의미 하나, 결국 ‘고맙다’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미움과 분노가 사라진 후, 절망과 좌절도 가라앉은 후, 아무도 모르게 존재하는 모든 것에 간절한 인사를 합니다. 자신에게 함몰됐던 정신이 여유를 찾는 과정이라고 할까요?
평화는 산을 내려가는 길에 습기처럼 말라 사라지긴 했습니다. 하지만 산에 가기 전보다는 훨씬 나았어요.
이렇게 산을 다니는 내가 희숙 씨는 궁금했을까요? 같이 가자고도 했어요. 난 혼자서 내 생명에게 나 나름의 제사(祭祀)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희숙 씨가 함께 다니면 온전한 평화를 느낄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도 함께 다닌 적이 있지요. 거의 늦은 오후나 저녁 무렵. 높이 올라가지 않고 근처 산비탈의 토끼길을 걷는 정도. 그런 곳엔 봄철이면 버찌가 까맣게 익어서 따 먹을 수 있었고, 산딸기를 따 먹고 부드러운 찔레 순도 잘라서 껍질을 벗겨 먹었지요. 가을이면 손톱만 한 산밤을 주워서 까먹고. 중년의 여자 둘이 마치 소녀들처럼.
자기는 3층에서 내 생활을 거의 다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보이는 건, 무엇이든 다 본 셈이지요. 우리는 함께 나란히 서거나 한가롭게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어요. 그래도 느낄 수는 있었지요. 자기가 나를 이해한다는 것.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걸 감지한다는 것. 경멸도 질투도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참, 백련사 가는 길 어귀에서 수십 년째 ‘뻥튀기’를 하는 아저씨 내외분이 계시잖아요. 우리 둘 다 단골이죠.
그곳을 떠난 뒤에도 뻥튀기를 하러 아저씨한테 가곤 했지요. 나는 쌀을 메고 둘레 길을 걸어서.
그사이 우리는 할머니가 됐는데… 돌아보면 모두가 단풍 색깔을 띤 사랑이네요.
글·사진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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