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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3월호

세대와 톨레랑스



<쓰다> 26호 포스터.

최근 발행된 인문 잡지 《한편》 1호 ‘세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탈코르셋 운동이 의미화되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그럴 만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발화 권력을 가진 기성세대가 운동에서 터져 나오는 서사로부터 자기 자신의 경험을 곧장 환기해 버린 데 있었다. 청소년기에 또래 문화에서 배제되는 일이 민감한 문제임을 이해하고, 주된 압력에 저항하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일수록 꾸밈을 금지당했던 자신들의 교실 속에서 꾸밈은 곧 자유를 상징하고, 꾸민 이들이 배제당하지 않을 권리를 떠올렸다.” (이민경, <1020 탈코르셋 세대>)
지금의 1020 세대에겐 화장이 ‘자유’가 아닌 ‘노동’이라는 점을 기성세대가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대목에서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어린 여성을 이해하는 데 해석이 필요한 나이가 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나 역시 화장이 자유를 상징하던 시기에 10대와 20대를 보냈다. 그래서인지 1020세대 여성들이 쇼트커트를 한 자기 모습을 인증하거나 화장품을 버리는 사진을 SNS로 마주할 때마다, 나는 그것이 여성성으로 규정된 하나의 모습에서 탈피하는 것을 과격하게 드러내는, 조금은 단순하고 어린 행동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어느 세대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나보다 나이가 적다는 이유로 그들의 행위가 지닌 가치를 낮추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부끄러웠다.
지난 <쓰다> 26호에 실린 성해나 소설가의 <Ok, boomer>는 세대 갈등을 다룬다. 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며 동료 선생들로부터 “영(young)” 하다는 칭찬을 듣는 데 자부심을 느끼는 주인공이, 아들과 함께 활동하는 밴드 멤버들을 만나며 겪는 미묘한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아들과 그 애의 동료들에게 건넬 첫인사를 고르며 현관으로 다가갔다.
어서 와요.
악수를 건네려 막 손을 내밀 때,
화장실 어디예요?
앞서 집 안으로 들어온 녀석이 내 말을 뚝 잘랐다. 머쓱하게 손을 거두곤 화장실을 가리켰다. 뒤에서 웃음이 터졌다. 나를 두고 웃는 건지, 화장실로 달려가는 녀석을 두고 웃는 건지 잘 가늠할 수 없었다.
성해나, <Ok, boomer> 부분

밴드 멤버들과의 적지 않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첫 만남부터 주인공은 이 무리에게 마음이 상한다. 아들 석희는 29세로 곧 서른에 접어든다. 그리고 아들의 동료들은 모두 아들보다도 어리다. 그들은 1999년생인 20대 초반이다. 아들 석희는 어린 멤버들과 어울리기 위해 매 순간 전전긍긍하지만, 주인공의 눈에 이 20대들은 예의 없고, 음악 같지도 않은 걸 음악이라고 우기며, 아무 때나 낄낄대는 시답잖은 놈들일 뿐이다. 주인공에게 그들이 말하는 20대의 신념이란 그저 “싸가지 없는” 반항에 불과하다. 다만, 처음부터 그가 “똘레랑스”를 포기했던 건 아니다. 주인공 또한 ‘어른’의 사회생활을 거치며 자연스레 기성세대의 자리로 편입됐을 것이다. 관용은 이해에서 비롯되는데, 애초 주인공과 99년생은 완전히 다른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경험한다.

내 주변에도 베지테리언이 몇 있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교감이었다. 나보다 다섯 살 많은 교감은 당뇨를 앓았고 마흔부터 고기를 끊었다. (…중략…) 아들은 트위터에서 공장식 축산과 동물 실험에 대한 트윗을 보고 채식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밴드 멤버들은 자기보다 더 철저한 베지테리언이라고.
성해나, <Ok, boomer> 부분

한 세대가 공유하는 가치를 다른 세대가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고기를 포기해야 하는 이유를 상상하기 힘든 베이비붐 세대에게는, 윤리적인 이유로 자기 식생활 마저 바꾸면서도, 어른을 대하는 태도만은 끝내 반(反)유교적인 저 밀레니얼 세대가 불쾌하기만 하다. 밴드 멤버들도 기분이 나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주인공은, “뭐 어쩌겠나 존중해 줘야지” 정도의 태도를 보이면서도, “영(young)”한 세계를 전적으로 이해하는 멋진 어른으로 인정받길 바라는 모순적 인물일 뿐이다.
거주지, 성별, 종교, 소득, 직업, 학력 등 한 세대 안에서도 서로를 영원한 타인으로 만들 무수한 조건이 있다.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화해는 한쪽에서 관용을 베푼다고, 자존심을 조금 죽인다고 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다. 관용과 배려에는 이해와 정보가 필요하다. 그들이 누군지 정확히 아는 것. 세대 간 톨레랑스는 그렇게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글 김잔디_[비유] 편집자
사진 제공 웹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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