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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3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16그리움과 추억으로 다리를 놓다
-시인, 고정희에게 가는 길-

고정희 시인

정희야. 잘 있지? 니가 있는 곳으론 가볼 수도 없고, 가본 사람도 없으니 상상조차 안 된다. 하지만 니가 있으니, 좋은 곳, 편안한 곳이라 생각할게. 니가 상상할 수 없는 그곳으로 떠난 뒤론 한동안 잘 만나지 못했던 너의 벗들이 모이는 곳. 아직도 있단다. 그 이름 그대로. 잘 알지? 여기까지만 귀띔해도 금방 알겠지? ‘또 하나의 문화’. 요즘도 그곳에서 나를 기억해 불러주면 무턱대고 간단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돼. 지난 연말엔 서로 인사말을 나눴어. 내 차례가 됐어.
“시인 고정희가 저를 이곳으로 데려왔습니다. 정희가 그리워서, 이곳에 오면 고정희를 그리워할 수 있어서 옵니다.”
이렇게 말했어. 그렇지만 목이 메어서 입안의 말이 너무 무겁게 젖어서 더듬거렸어. 갑자기 공간에 그리움과 슬픔이 고이는 것 같았어. 모두들 어찌 너를 잊겠니! 슬픔은 막아지거나 버려지지 않으니까.
너와 나는 동갑이야. 쥐띠. 생일은 니가 나보다 겨우 열하루 빨라. 너는 전라남도 해남에서 온 촌사람, 나는 강원도 동해안, 설악산 아랫동네에서 온 촌뜨기. 그런데 너는 품이 넓은 촌사람이고 눈은 서글서글, 키도 컸어. 나는 속이 좁은 자그마한 여자였지. 내가 너에게 시가 얼마나 시시하냐, 그렇게 짧은 거 쓰는 게 얼마나 쉽냐고 놀렸잖아. 사실은 시가 더 훌륭해. 진심이야.
우리가 어디서 처음 만났을까? 출판사? 아니면 음식점? 난 열등감 때문에 사람도 잘 못 만나고 어디 잘 가지도 못했어. 뇌 구조에 어떤 선(線)이 잘 연결되지 않은 것 같아. 모든 사람들이 잘하는 몇 가지를 못 하는 게 있어. 그래도 이렇게 여태 살아있긴 하네.
너와 나. 우리가 살아 낸 서울 공간에 돌멩이로 표시해 둘 장소들이 아주 많잖아. 한번 뒤져볼까?
우선 웃기는 장소부터. 혜화동 네거리야. 우리는 무슨 큰 행사 뒤에 어깨동무를 하고 그곳을 걸었어.
“경자야. 난 아직 처녀야.”
니가 말했어! 나도 모르게 폭소를 터트렸던 거, 기억나지? 너는 술을 한 잔 걸쳤고 나는 기분을 걸쳤고.
“야! 그걸 자랑이라고 말하는 거야? 여자한테 가장 중요한 공부거리가 남자 아냐?”
나는 너를 마음껏 조롱했어. 너의 기분은 헤아리지 못했어. 그렇지만 심각해 한 것 같아.
다음은 여성백인회관. 이맘때 니가 거기서 일했어. 가정법률상담소 편집부장으로. 그곳에서 니가 여성주의 소설 《절반의 실패》를 준비하던 내게 필요한 자료들을 챙겨줬어. 얼마나 유익했었는지 몰라. 그맘때, 우리 말이야, 여성해방의 사유나 그 실천에 대한 열망은 가히 혁명적이었지? 일단 젊었으니까. 너는 미혼이었지만 나는 아이 엄마. 그래도 나를 미혼으로 보는 사람들이 거의 다였어. 나의 태도나 생각, 표정, 말투가 다 미혼으로 보이게 했었나 봐. 그래서 좋았고 신바람이 났었어.
너는 얼마 후 그곳을 나와 《여성신문》 창간 일을 했어. 여성신문! 얼마나 놀라운 발상이고 실천이었던지, 흥분했지. 창간주주도 됐고. 그 후 《여성신문》에서 소설가를 필요로 하는 일들을 할 수 있었어. 그리고 너, 이 일을 하기 전부터 페미니스트들의 모임인 ‘또 하나의 문화’에 참여했지. 그곳에도 나를 데려가줬어. 그곳의 분위기는 외국에서 사회학이나 여성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많아서 지식인 냄새가 진동했어. 대화는 어찌나 영어를 섞어 쓰던지! 정서적으로 닿지 않아 잘 나가진 않았어. 하지만 여성해방문학 등의 일엔 같이 했었지. 뿐만 아니라 그곳 친구들과 함께 경험할 수 있었던 것, 소중한 추억들이 많아. 다 너의 배려였어.
다음은 우리가 함께 부업으로 일했던 신사동 강남출판문화회관. 출판사 한길사에서 운영했던 ‘한국문학학교’. 생각나지? 너는 시를 가르치고 나는 소설을 가르쳤어. 그땐 정말 문학의 황금기였나 봐. 문학 지망생이 넘쳐나서 면접을 보고 학생을 뽑았으니까. 여기에 15년 형을 받고 중간에 가석방된 시인 김남주도 일했었지. 우리가 여성백인회관에서 김남주 석방을 촉구하는 궐기대회를 했을 때 니가 말했던 거 생각나네. 두 사람의 아버지들이 남주와 정희가 크면 혼인 시키자고. 사돈 맺자고 약속하셨댔지? 어쨌든 지금, 해남 너의 생가 뒤뜰에 너의 묘지가 있잖아. 김남주의 문학관도 해남에 있고.
수유리 지하 나의 글 쓰던 방, 거기서 너도 하룻밤 잤지? 그 방에서 글을 쓰고 있었는데 정오 무렵 갑자기 동네의 모든 까치들이 모여 들어 마구 짖어대는 거야. 고양이가 까치를 잡았나? 상상했지만 그 떼로 짖는 소리가 불길해서 마음이 얼어버렸어. 그런데 불길함이 다 가시기 전에 전화를 받았어. 고정희 선생님이 지리산 뱀사골에서 폭우를 만나 세상을 떠났다고…….
그날부터 니가 자꾸 꿈에 나오는 거야. 광주에 가서 너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뒤로도 거의 매일 꿈에 니가 나타났어. 모든 꿈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그래서, 이런 행사를 꾸렸어. ‘고정희 추모의 밤’. 출판문화회관 지하 강당이었지. 많은 분들이 와줬어. 시인 김초혜 선생님께서 떡을 해 오셨던 것도 잊히지 않아. 그런데 신기한 일이 생겼어. 이 행사를 마친 뒤로 너는 다시 내 꿈에 오지 않는구나…….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안다/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도 안다/방황하던 시절이나/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너의 시 <사십대>를 읽는다. 지금 곁에서 느껴지는 너……부디 잘 지내렴.

글·사진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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