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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2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13위선(僞善)에 두 손 들었다

1970년대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모습.
(본 이미지는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유물정보’에서 서비스되는 이미지를 활용했습니다.)

서울의 서쪽 끝에 산 적이 있었다. 지하철 1호선 역이 있는 오류동. 서울특별시와 경기도의 경계지역이다. 서울에서도 중심이 아니고 경계 즈음에서 산다는 건 좀 별다른 기분을 느끼게 했다. 한 발만 내디디면 서울 사람이 아닐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랄까? 그래도 서울인데, 이런 안도감이랄까.
내가 살던 그 당시 오류동역 앞은 아주 넓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역을 빠져나오다 보면 한편에 보이는, 낡은 2층짜리 건물이었던가? 그 건물은 수년 동안 지나다니면서도 눈길이 닿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건물에 들어와 있는 봉제공장에 취직을 하면서 내게 아주 특별한 곳이 되어버렸다. 물론 당시 유행처럼 위장 취업한 운동권 대학생은 아니었다. 그래도 늘 세상 돌아가는 것에 분노와 두려움을 한꺼번에 느끼는, 분열증 초기 증세를 가진 미성숙한 소설가이긴 했다. 이런 소설가에게 관심을 가져준 출판사 사장이 있었다. 그는 1974년 유신체제에 반대한 민청학련사건의 관련자로 구속돼, 사형선고를 받았던 나병식이었다. 그가 이런저런 이유로 나를 몇 번 만난 뒤에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가 했던 말을 간단하게 줄여보면 ‘너 같은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소설을 쓰겠냐! 소설가라는 게 참 한심하다. 공부 좀 해라!’였다. 창피하고 화도 났다. 하지만 부끄러움이 훨씬 컸다.
그가 내게 시킨 것 중의 하나가 공장에 취직하라는 것이었다. 1년은 해야 하지만 그렇게 못하겠다면 6개월이라도 작정하고 다녀보라는 것이었다. 그의 그렁그렁한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하여간 그의 말을 듣는 동안 자괴감에 땅속으로 꺼져버리고 싶었다. 그와 헤어져 돌아온 뒤로도 그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런 사형수(!)와 만나지 말든가, 공장에 취직을 하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혀 지냈다.
결국 공장에 취직하기로 결심했다. 집에 아직 잘 걷지 못하는 아이가 있으니 가능하면 집 근처에서 다닐 만한 공장을 알아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류동역에서 걸어 나오다가 여공 수시 모집 광고를 보았다. 역 앞 광장의 한구석에 지어진 허름한 2층 가건물 앞이었고 무슨 물산이란 간판이 붙어 있었던 것 같다. 필요한 서류는 주민등록초본이었을 것이다. 그래, 여기다! 다음날 아침, 초본을 떼어 들고 공장에 갔다. 취직은 금방 됐다. 남자 사무직원이 나를 곧장 2층의 공장으로 데려갔다. 2층 봉제실엔 교실같이 3줄인가 4줄로 재봉틀이 놓여 있었다. 재봉틀 앞엔 숙련공, 그 숙련공 아래 낮은 나무판자에 걸터앉은 사람들은 ‘시다’로 불리는 보조원이었다. 재봉사가 박음질을 끝낸 방한용 장갑을 받아 실밥을 뜯고 잘 뒤집어놓는 일이 보조원의 일이었다. 어느 퇴역 장군인가가 하는 군수공장으로 제품 전량을 납품하고 있었다.
나는 한참 어려 보이는 소녀들이나 할머니들 사이에 끼어 일을 시작했다. 옆에 앉은 할머니가 내게 관심을 보였다. 보기엔 이런 데서 일할 것 같지 않은데 무슨 사연이 있느냐고 물었다. 사연을 지어내는 덴 사기꾼 수준이니, 아주 간단했다. 남편이 없다……. 대충 그렇게 말했다. 할머니는 내게 용기를 줬다. 아직 젊으니 눈썰미가 좋아 금방 기술자가 될 것이다, 그럼 봉급이 올라간다……. 그런 말을 듣는 동안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작업대 사이를 지나다니는 반장이나 기술자 감독들, 모두 남자인 그들의 눈길이 탐조등처럼 느껴졌다. 여성 기술자들은 대개 20대로 보였는데 재봉틀 한구석에 손거울을 붙여놓았고 천장 모퉁이에 달아놓은 스피커에선 유행하던 노래가 쉬지 않고 흘러나왔다. 어떤 노래엔 일제히 따라 불러 공장 안이 들썩거렸다. 재봉틀이 고장 나면 남자 기술자가 고쳐줘야 했다. 그것을 권력으로 여성 노동자를 성적으로 착취했다. 그들의 욕망을 모른 체하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수리를 미뤄 일을 못하게 만들었다. 일을 못하면 일당이 낮아졌다. 일당은 채워도 돈을 모으려면 생라면을 씹어 먹고 군것질도 하지 말아야 했다. 절약은 자기 몸이 필요로 하는 생필품에서 짜내야 했다. 잠자리는 더 엉망이었다. 원단이 가득 쌓인 창고 같은 곳에서도 잠을 잤다. 공장의 사무직 남자들이나 남자 기술자들은 모두 여성 노동자의 몸에 관심을 보였다. 단지 몸에 대해…….
처음 한동안은 공장에서 나오는 보리밥과 멀건 김칫국이나 된장 냄새가 겨우 풍기는 우거짓국을 먹었다. 잘 넘어가지 않았다. 내가 하루 일당으로 받는 돈은 냉면 한 그릇 값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면서 나는 노동자가 되어가는 게 아니라 소설가로 열심히 취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구경꾼이었다. 타인의 삶에 대해 구경하는 일만큼 간악한 것이 어디 있을까. 그건 착취자의 시선이었다. 내가, 보조원을 그만둔 건 이런 죄책감 때문이었다. 아무리 일을 해도 나는 재봉사의 보조원이 아니었으며 내 생활은 따로 있었다.
나중에 나병식은 내가 일을 너무 빨리 그만뒀다고 매정하게 나무랐다. 그러나 그가 무어라든 더 이상 자괴감은 들지 않았다.

글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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