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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2월호

아르기리스 파파디미트로풀로스 감독의 <선탠>매일 처음 늙어보는, 매일 뒷걸음질 치는
흔히 나이 든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관용과 지혜, 여유와 성공을 기대한다.
미혹되지 않고, 관대하며 청춘을 응원하는 든든한 조력자이길 바란다.
내 인생과 가장 멀찍이 떨어져, 사실은 나와 상관없는, 하지만 내가 필요로 할 때 꺼내볼 수 있는 실용서 같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그 기준에서 조금만 멀어져도, 중년은 속물 혹은 꼰대라는 별칭으로 폄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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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뜨거운 구애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듯 나이가 든다고 절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사는 것이 지겹고 권태로운 사람은 없다. 지긋지긋한 일상을 견디는 데 꽤 익숙해 보이지만 누구에게나 나이가 든다는 것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것은 언제나 첫 경험이다. 단지 곁눈질을 하면, 길을 벗어나면 힘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어느새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져서 참을성이 늘어나는 것 뿐이다.
모두 매일 겁나지만 유연하게 숨기는 법에도 익숙해진다. 하지만 매 순간, 살아 있다는 것은 두렵다. 가장 두려운 순간은 매일 힘겹게 옮겨가던 발걸음이 어느 순간 뒷걸음이었단 사실을 깨달을때다. 아르기리스 파파디미트로풀로스 감독의 <선탠>은 그렇게 처음으로 중년을 겪는 서툰 사람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영화다. 카메라는 인물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대신, 그의 소동 속으로 들어가 그의 이야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걸 택한다.
이야기는 괴괴한 후퇴의 삶, 권태로운 일상 속에 살던 40대 의사 코스티스가 그리스의 어느 섬마을에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어떤 것에도 희망을 품거나, 어느 시간과 사물에도 애정을 두지 않는 그는, 다른 선택지나 변화는 없을 것 같은 권태에 빠져 소통하는 법도 없이 지낸다. 그런 그의 삶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여름, 섬마을이 관광지가 되면서부터다. 감옥처럼 갇힌 내부인들의 공간이 외부에 개방되면서 펄펄 끊는 용광로처럼 뜨거워진다.
자유분방한 청춘, 안나가 파랑새처럼 그의 품으로 뛰어든다. 코스티스의 집착은 안나를 괴롭히고 고립시켜, 더 강한 결속력으로 자신과 단단히 묶어두려는 마음에 담긴다. 자신의 집착이 청춘에 대한 열망인지, 청춘이었던 열망에 대한 갈망인지 되짚어볼 짬도 없이 그는 그 열정을 사랑이라 믿고 안나에게 빠진다.
아르기리스 감독은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하는 ‘선탠’은 누군가에게는 여유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살아 날뛰는 것 같은 청춘의 몸과 애처로울 정도로 망가진 중년의 몸을 함께 전시한다. 강한 어조는 아니다. 오히려 덤덤하게 두런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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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차가운 실연

아르기리스 감독은 권태로운 코스티스의 일상을 색이 바랜 듯한 건조한 느낌으로 보여주다, 안나가 찾아온 여름 바닷가 장면부터 또렷하고 눈부신 색깔로 확 바꿔버린다. 그렇게 겨울 같은 코스티스와 여름 같은 안나를 대비시킨다. 코스티스의 열정이 과해질수록 태양은 더 눈이 부시고, 밤은 더 눅눅해 보이는 것도 인상적이다.
구애하는 코스티스와 거부하는 안나가 짚으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해안가의 얇은 가름막 사이로 갈라지는 모습을 부감 숏으로 담은 장면은 청춘과 중년의 갈라짐, 관계에 벽이 생기고 균열되는 순간을 상징적으로 담아낸다. 감독은 그 장면을 통해 상대방의 말이, 미처 꺼내지 못한 마음을 알지 못한 채, 말이 되는 순간 무너져버리는 위태로운 관계를 지탱하는 것은 결국 외면과 부정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오롯이 자신을 방어하려는 안나의 말이 상대에게 폭력이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선탠>은 목이 마를 만큼 건조한 영화다. 넘어지면 가뿐하게 일어나지 못하고 철푸덕 소리를 내고야 말 것같이 땅에 가까운, 한 외로운 남자의 삶을 코앞에 전시한다. 그리고 스산한 삶 속에서 끝내 열정을 놓아버리지 못하는 코스티스의 땀냄새를 통해 삶의 비루함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을린 식도로 뜨거운 물을 삼키는 것처럼 뻑뻑한 시간들이다. 감독은 서툰 코스티스를 굳이 동정하거나 감싸지 않는다. 상대방의 마음에 가닿지도, 오롯이 던져지지도 못한 너덜너덜한 피구공같은 코스티스의 마음이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끝내 헌신짝처럼 살아온 코스티스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나서야 끝을 낸다. 그래서 <선탠>은 제목과는 달리 냉기가 느껴질 만큼 차갑다.

글 최재훈 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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