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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2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후암동의 젊은 느티나무

후암동의 젊은 느티나무

소설 <젊은 느티나무>를 쓰신 소설가 강신재 선생님을 만나러 갔던 후암동. 반세기가 지난 일이었다. 기억을 더듬고 추억에 잠기는 것만으로는 아무래도 찜찜해서 다시 가보기로 했다. 기해년 1월 3일 오후 3시. 영하 2도에 체감온도 영하 8도. 하지만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쩍쩍 붙던 고향의 한겨울 추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지난해 봄부터 무릎에 노쇠의 기미가 나타나 예전처럼 빠르게 걷지는 못하는데 기억을 더듬어 현재로 불러내는 걸음걸이로는 제격이다 싶었다. 심호흡하듯 걷는 걸음이니 1965년 가을과 1966년 초봄의 후암동을 더듬듯 살피고 멈춰서 바라보기엔 되레 다행이었다.
남산공원 방향 어디쯤에 내가 알고 있는 후암동이 있을 텐데 길가엔 온통 빌딩들이 산처럼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건물 뒤로는 아무것도 없을 것만 같은 빌딩의 위압감은 아무리 서울에 살아도 그 근본을 벗지 못하는 시골 출신의 열등감이나 저항감이 불러내는 감정일까? 이런 기분으로 경사가 시작된 길로 한발 한발 내딛는데 이내 <후암동 길> 표시가 보였다. 반갑고 맘이 놓였다. 내가 난생처음 보았던 후암동의 얼굴과 표정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처음 본 후암동도 한 세기 전이나 아니면 옛날이라고 불러야 할 때의 그곳은 아니었다. 다만 그곳은 넓고 두터운 바위 후암(厚岩)이 있었고 어수(御水)라는 이름의 물이 있었으며 산등성이의 앞뒤를 가르는 마루엔 서낭당이 있어서 서낭당 고개라 불렸다. 옛날의 고개 마루에 있었을 서낭당. 사방에서 오르고 내리던 사람들이 서낭당 그늘에 앉아 숨을 골랐을 것이다. 숨을 고르면서 난생처음 보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어쩌다 이웃의 안부도 얻어듣게 되었을지 모른다. 서낭당은 저절로 소통과 우호와 안녕의 의미를 두루 품고, 사방으로 들고 나던 사람들은 그곳에 앉아 몸과 마음의 해로운 기운들을 털어냈을지 모른다. 이웃과의 오해나 원망, 그리고 넘치거나 덜한 것들의 수평을 잡아 마음의 평안을 도모했을지. 다른 것을 이해하고 차이 나는 것을 존중하게 되는 쉼터……. 무식하지만 무턱대고 서낭당에 기댔을 사람들의 마음을 상상했다. 어쩌면 소도(蘇塗)가 사라진 뒤에 필요하지 않았을까.
나에게 후암동은 소도까지는 아니었어도 하나의 출발점은 됐다. 강신재 선생님은 숙명여대에 응모한 내 소설을 심사하셨는데 글을 쓴 시골 아이를 꼭 보고 싶어 하셨다고, 학교에서 말했었다. 그래서 찾아간 후암동 남산 기슭의 일본식 집. 잔디가 깔리고 정원수가 심어진 집에 들어섰을 때의 놀라움은 아직도 생생하다. 이때까지 나는 그런 집을 영화에서나 봤지 실제로는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책에서만 읽은 소설 <젊은 느티나무>의 작가를 만난다는 게 내 현실감각을 마비시키고도 남았다. 지금 생각해도 나는 녹지 못하는 얼음덩어리 같았다. 초인종을 누르고 일하는 분의 안내로 안방에 들어가 앉았을 때, 나는 ‘신분적 품격’이란 걸 경험했다. 고향에선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교장선생이나 아버지, 혹은 성당의 서양 신부님에게서는 경험할 수 없는 품격이었다. 나로선 가닿을 수 없는 생활 같은 것.
“선생님은 외출 중이시고 곧 돌아오신다, 기다리라…….”
이렇게 말한 아주머니도 영화에서 본 것 같았다. 최은희나 문정숙, 혹은 김지미가 주연한 영화들에서.
장판이 깔린 방의 바닥은 따뜻했다. 고향집도 장판이긴 했지만 달랐다. 고급이 있어서 하급도 있기 마련인 현실이었다. 선생님을 기다리는 동안 개다리소반 같은 것에 담아온 과일 접시를 구경만 하면서, 나는 울 것 같았다. 혼란 때문이었다. 문학소녀의 천진난만한 정신에 해일처럼 쳐들어온, 이해할 수 없는 생활의 불협화음, 그 이질적 현실들이 슬픔을 넘어 공포를 몰고왔다. 그래도 그날 울지 않았던 건 참 다행이었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 <젊은 느티나무>의 강신재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회색 치마에 연 분홍 저고리를 입고 조금 긴 머리를 하고 계신 영화배우 같은 얼굴의 선생님!
선생님은 내게 소설가가 되기 전에 ‘세계명작’을 모두 읽어두라고 하셨다. 그리고 또 많은 말씀들을 해주셨다. 나중에 소설가가 되었을 때의 나를 위한 조언들이었다. 무언가 곧 소설가가 될 것 같은 기대감이 마구 무책임하게 속절없이 허파를 채웠다.
1966년 초 봄 어느 날 다시 후암동으로 갔었다. 그날 선생님은 고등학교 교복을 벗은 내 모습을 경계의 눈빛으로 보셨다. 오랜 경륜을 쌓은 소설가의 직관에 가시처럼 걸린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선생님을 다시는 뵙지 못했다. 선생님의 경계하시는 듯 보이던 눈빛이 지워지지 않은 까닭도 있었고 우리의 삶은 각기 다른 층 위에 있기도 했다. 비누 냄새가 나는 사람에 대한 묘사보다 구정물 냄새가 몸에서 잘 씻기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 그리고 그 환경에 대한 분노가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나였고, 다른 개성이었다.
글 이경자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사진 김영호 서울문화재단 혁신감사실 혁신기획관

※ 바로잡습니다. 지난 1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중 ‘낮선’을 ‘낯선’으로 바로잡습니다. 정정 내용을 알려주신 이재수 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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