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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월호

북창동이 지나온 시간들한국 현대사, 동네에서 읽다
서울 중구 태평로2가 23(서울 중구 소공로 119)에 자리 잡은 더플라자호텔은 1976년 개관했습니다. 그전까지 북창동(北倉洞)으로 불렸던 이 지역에는 서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중국 화교촌이 있었습니다. 북창동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 선혜청(宣惠廳)의 북쪽 창고가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습니다. 조선 중기 대동법 시행에 따라 신설된 선혜청은 쌀과 베, 돈을 관리하던 관청으로, 숭례문 수입상가 자리에 있었습니다. 지금도 수입상가 앞에 선혜청 표지석이 있습니다. 쌀을 녹봉으로 받은 관리들이 주변 상가에서 생필품으로 교환했고, 이 시장이 확대돼 남대문 근처에 상권이 형성됐다고 합니다.

더플라자호텔 자리에 있던 대한체육회 목조 건물.

<사진> 더플라자호텔 자리에 있던 대한체육회 목조 건물.

화교촌에서 유흥업소 밀집촌으로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가 들어온 후 청나라 상인들이 북창동에 자리 잡기 시작했고, 1910년 화교촌이 형성됐습니다. 이들은 삼각형 모양의 400여 평 땅에서 중국음식점, 한의원, 목욕탕, 잡화상, 서점 등을 운영했습니다. 하지만 1968년부터 소공지구 재개발 논의가 시작됐고, 높은 빌딩을 지어 지저분한 도심의 치부인 이곳을 가리려 했습니다. 1971년 서울시는 화교촌 지주들과 협의를 거쳐 이 지역의 철거를 시작했습니다. 서울시 도심재개발사업의 첫 번째 시도였지만 종합 계획이 마련돼 있지 않은 상태에서 착수해, 공사는 며칠 만에 중단됐다고 합니다. 결국 철거가 진행됐고, 화교상인들은 서울시가 마련해준 가건물에서 영업을 이어갔습니다.
민주화 열풍이 분 1987년에는 시위대가 북창동길을 누볐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담은 6·29 선언이 발표되던 날 신문 호외가 뿌려지자 이곳 상인들은 시민들에게 무료로 커피를 나눠주며 기쁨을 나눴습니다. 당시 북창동 한 커피숍 창에 ‘오늘은 기쁜 날, 찻값은 무료입니다’라는 글귀가 붙었습니다.
1990년부터 북창동에 유흥업소가 물밀듯 들어섰습니다. 이들 업소들은 퇴폐 영업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북창동은 부정적 이미지를 얻었습니다. 당시 한 신문에 이곳에서 불법 나체공연을 하던 호주인들이 추방됐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서울시경은 외국인 무용수를 불법으로 고용해 나체쇼를 공연해온 극장식당 대표를 공연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경찰은 또 호주인 여자무용수 5명과 남자무용수 2명을 출입국관리법 위반 혐의로 강제 출국시키기로 했다.”
1995년에는 내무부 차관이 한 신문에 ‘룸살롱 유감’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한국형 술집이요 음주문화 공간이 룸살롱이라는 것에 이론은 없을 것이다. 맨 처음 서울 북창동에 생겨난 멕시코 살롱에서부터 이태원을 중심으로 강북에 번지더니 그 유명한 강남의 룸살롱 거리가 조성된 것이다. (중략) 이 바람직하지 못한 룸살롱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일제의 잔재인 요정의 영향인가 우리 사회의 은닉성을 부추긴 일말의 세태를 반영한 것인가. (중략) 남정네들이 룸살롱에 뿌리는 술값을 주부들이 안다면 놀라 자빠질 것이다. 지금 농촌에는 총각들이 나이 40이 넘어도 혼인을 못해 애태우는데 유흥업소에는 웬 아가씨들이 그리도 많은지. (중략) 그동안 룸살롱에서 팁 많이 뿌리고 제대로 대접 못 받아 불쾌해하던 선생들, 이제 룸살롱 출입을 끊읍시다.” 2000년대 초반까지 성업하던 유흥업소는 이곳이 관광특구로 지정되며 사라졌고, 그 자리에 관광호텔과 음식점이 들어섰습니다.

북창동과 대한체육회

<사진>은 더플라자호텔 자리에 있던 대한체육회의 목조 건물 모습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 ‘조선체육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된 대한체육회는 스포츠를 통해 한국의 저력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대한체육회 창립 초기에는 회장의 집 방 한 칸을 빌려 사무를 봤을 정도로 여건이 열악했습니다. 이후 이곳저곳 사무실을 옮겨 다니다가 6·25 전쟁 때는 부산에 연락사무소를 두기도 했습니다. 대한체육회가 처음으로 번듯한 회관을 마련한 건 자유당 정권의 실력자인 이기붕 씨가 회장으로 있던 1956년입니다. 북창동에 자리 잡은 대한체육회는 10년간 이곳에서 업무를 보다 1966년 6월 무교동에 지하 1층, 지상 10층 규모의 건물을 지어 이전했습니다. 그리고 1989년 12월 현 사무실이 있는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회관으로 옮겼습니다.

사진 고(故) 김천길 전 AP통신 기자. 1950년부터 38년 동안 서울지국 사진기자로 일하며 격동기 한국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글 김구철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대중문화팀장으로 영화를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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