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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0월호

돈의문 박물관마을새 바람이 불어오는 곳
2017년 9월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와 함께 문을 연 돈의문 박물관마을. 돈의문이 있던 성곽 안의 오래된 작은 마을은 마을 그대로 박물관이 되었고, 현재 마을 곳곳에서 전시 및 교육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대규모 철거 이후의 도시 재개발이라는 기존 방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도시재생을 시도한 돈의문 박물관마을의 시간과 공간을 살펴본다.

돈의문,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던 곳

돈의문 박물관마을이 위치한 곳은 서울의 사대문 중 하나인 서대문, 즉 돈의문의 바로 북측 성곽 안에 위치한 자문동이라는 동네였다. 지금은 성문도 성곽도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성곽 안의 마을은 뉴타운사업의 여파에도 살아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915년 경성시구개수사업 시행에 따라 신문로의 도로 확장과 개수로 인해 사라진 돈의문은 유독 이전(移轉)과 철거를 반복한 사연 많은 문이었다. 세종 때 도성을 보수하며 새로 만든 문이라고 하여 ‘돈의문’이라는 이름 대신 ‘새문’ 혹은 ‘신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1899년에는 청량리와 서대문을 잇는 전차가 부설되며 전차가 통과하는 문이 되었다.
돈의문을 지나 서측으로 이어지는 도로(현재의 충정로)는 조선시대부터 도성에서 아현을 지나 마포로 가는 주요 대로였는데, 이 도로는 도성 밖을 연결하는 동시에 인천-마포를 통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길이기도 했다. 중국 사신들이 의주로와 서대문을 통해 입경했듯이 개항 이후 외국인들은 서대문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다. 서대문에서 정동에 이르는 지역에는 미국, 프랑스, 영국, 러시아, 독일 등의 영사관들이 들어섰으며 서양인들이 영업하는 호텔이나 상점도 자리 잡았다. 1900년 서대문역 개통 이후에는 서대문 도성 안뿐 아니라 바깥 지역인 평동, 교남동 등에도 서양인들이 많이 정착하면서 서양식 저택이 세워지거나 종교단체의학교 등이 건립됐다. 1910년 식민화와 함께 서울에 왔던 서양인들이 다수 돌아갔고, 외교 공관들도 문을 닫으며 서양인들이 소유했던 지역은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 일대는 서울의 관문이자 서울의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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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의문 박물관마을의 마을 마당. 1930년대 건축된 도시형 한옥, 일식 주택, 1960~70년대 지어진 슬래브 주택까지 다양한 주택군에 둘러싸여 있다.

2 돈의문전시관 아지오와 한정

새 문과 성곽은 사라졌지만 새 문 안 동네들은 남아

1915년, 돈의문은 도로 확장과 함께 철거됐다.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도 동향에서 남향으로 방향을 바꾸어 앉았고, 광화문 앞 사거리에서 서대문까지 이어지는 도로는 15칸(약 27m) 폭의 근대화된 대로의 모습을 갖추었다. 도로뿐 아니라 돈의문 박물관마을이 위치한 자문동 주변의 동네 풍경 역시 크게 달라졌다. 1909년 설립된 중학교는 1910년 경희궁 터로 옮겨 교사를 신축했는데, 이때 승정전 등 일부 전각은 경성중학교의 교사로 사용되고 공지는 운동장이 됐다. 경기감영은 한성부로, 고양군청으로, 또 현재의 적십자병원으로 용도가 바뀌었으며 용도의 변화에 따라 많은 건물들이 신축되며 감영 앞 사거리의 풍경도 크게 변해갔다.
돈의문 박물관마을의 서측 경계를 형성하던 성벽은 1930년대 중반까지 존재했으나 그 이후 철거되었고, 1938년에는 금광업자 최창학이 서쪽 죽첨정 1정목 일대에 죽첨장(현재의 경교장)이라는 별장을 지었다. 1930년대에 마을 내 자문동 7번지는 필지가 분할되어 도시형 한옥들이 집합적으로 들어섰다. 1935년 유한양행은 신문로 대로변의 6번지 모서리에 면한 대지의 형상을 따라 서양식 2층 건물을 지었다. 이 건물은 1962년까지 사용됐다. 성곽을 따라 형성된 작은 마을은 성곽이 해체된 이후에도 이어졌다. 1930년대에 지어진 일식 주택과 도시형 한옥을 비롯하여 1960~70년대의 슬래브 집, 프랑스식 집 등 시대별 특징을 담은 집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작은 규모의 음식점들과 심야의 음악감상실 역할을 한 LP바 등은 도심 속 숨은 명소로 자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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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돈의문 마을 7번지 도시형 한옥들.

4 2016년 4월, 도시재생사업 직전의 돈의문 마을 모습.

박물관이 된 마을, 마을을 담은 박물관

돈의문 박물관마을의 집들에는 이름이 없다. 아니, 이름 없는 집은 없겠지만 우리는 그저 도시형 한옥이라느니 일식 주택이라느니, 슬래브 집, 프랑스식 집 등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이름으로 그 집들을 부른다. 혹은 아지오, 한정 등 이곳에 오래 자리했던 식당들의 이름으로 부른다. 멋진 이름을 가져본 적 없는 집들이 철거 위기를 이겨내고 ‘돈의문 박물관마을’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기적이 아닌가 싶다.
유한양행 사옥이었던 현재의 서울도시건축센터 건물의 우측 계단을 따라 오르면 작은 골목들이 연결되며 다양한 켜의 주택들이 등장한다. 마을 중심의 몇 개 동을 철거하고 만든1)마을 중앙 마당에서 주위를 둘러보면 1930년대의 도시형 한옥, 1960~70년대 지어진 2층 슬래브 양옥, 1930년대 지어진 일식 주택을 개축한 집, 1960~70년대 지어진 프랑스식 집, 1930년대 지어진 유한양행 사옥을 리노베이션한 도시건축센터까지 다양한 층위의 건축물들이 펼쳐진다. 다 같지 않고 다채로운 풍경. 그 풍경 속에서 이 작은 성곽 마을에 쌓인 시간을 만나게 된다.
새 바람이 불어오던 서대문 언덕 위의 마을, 새로운 것들이 들어와 충돌하고 적응하며 만들어낸 서울의 시간 말이다. 물론 도시재생이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돈의문 박물관마을을 만드는 데도 시행착오와 진통의 과정이 있었다. 이곳을 가득 채웠던 오래된 식당과 가게가 사라진 건 내내 서운한 일이다. 하지만 돈의문 박물관마을을 시작으로 이 같은 시도가 좀 더 다양하게, 그리고 더 포용력 있게 이루어지길 바란다.
돈의문 박물관마을을 설계한 기오헌의 민현식 건축가는 이곳을 설명하며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한 구절을 인용했다. 다시 한 번 그 문구와 함께 돈의문 박물관마을의 의미를 생각해본다.
“도시는 자신의 과거를 말로 서술하지는 않습니다. 그 과거의 기억들이 거리의 모퉁이에, 창문의 창살에, 계단의 난간에, 깃발 게양대에, 피뢰침의 안테나에, 그리고 모든 부분 부분에 흠집으로 각인되고 무늬같이 새겨져 마치 손에 그려진 손금과도 같이 담겨져 있을 뿐입니다.”

1) 원래 68개동의 건물이 있었는데 그중 일부는 철거되고 일부는 철거 후 신축, 나머지는 대수선을 거쳐 현재 43개동의 건물이 마을을 구성한다.
글·사진 이연경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건축역사이론 전공으로 석·박사를 취득했다. 한성부 내의 일본인 거류지에 대한 박사논문으로 제6회 심원건축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인천대 지역인문정보융합연구소에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한성부의 ‘작은 일본’ 진고개 혹은 本町>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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