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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2월호

사진작가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작품과 영화 <고스트 스토리> 공간에 배인 슬픔
한적하고, 평화롭고, 그래서 무료하기까지 한 미국 교외 중산층 거주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아서, 실은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공포를 내포한 공간. 교외 지역의 이런 섬한 온도는 ‘컬트의 제왕’ 데이비드 린치를 비롯한 많은 감독들이 미국인의 심리를 드러내는 배경으로 사용해왔다. 미국 텍사스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의 <고스트 스토리> 역시 이런 한적한 공간의 공기를 바탕에 두고 살펴보기에 더없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영화의 틈 관련 이미지

한 장의 사진처럼 치환되는 장면

작곡가 C(케이시 애플렉)와 그의 부인 M(루니 마라)이 함께 기거하는 공간은 교외의 낡은 집이다. 영화의 시작 지점, 이들은 이사를 계획 중인데 무료한 이 공간을 떠나고 싶어 하는 M과 달리, C는 이 집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다. M은 자신의 말에 건성으로 응수하는 C가 영 마뜩치 않다. 하지만 둘의 이러한 미묘한 신경전은 곧 종식된다. 자동차 사고로 C가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본격적인 시작은 이때부터다. 시체 안치실에 누워 있던 C는 유령이 되어 집으로 다시 돌아오고, 이때부터 집을 떠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아내 M을 지켜본다. 영화의 전체는 C의 시선으로 처리되며, 그 외의 시선은 일체 개입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차원이 다른 공간에 살고 있는 유령이라는 제약 때문에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갈 수 없는 안타까움, 슬픔, 고독 같은 것들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실제 텍사스에서 자란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은 오래된 소도시에 대한 애착이 컸고, 갑갑한 이 도시를 떠나 큰 도시로 가려는 아내와 심하게 다투던 중 <고스트 스토리>의 이야기를 착안했다고 한다.
C의 유령은 시체를 덮었던 커다란 이불보를 그대로 뒤집어쓴 채 공간을 이동한다. 마치 걷고 있지만 발이 없는 듯 유영하는 이미지다. C는 병원에서 곧장 집으로 왔지만, M은 남편의 존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영화를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압도적인 장면이 등장하는데, 바로 남편을 잃은 충격과 슬픔, 비통함을 짊어진 M이 이웃이 기운 내라며 놓고 간 파이를 먹는 장면이다. 카메라는 4분 동안 어떤 대사나 음악 없이, 부엌 싱크대에 기대어 앉아 꾸역꾸역 파이를 먹는 M의 행위를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한시도 쉬지 않고 파이를 먹고 있지만, 그녀가 먹는 파이의 어떤 맛도 전달되지 않는다. 그 행위를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오로지 상실의 슬픔과 아픔이다. 이때 카메라는 프레임 안에 그 아픔을 보고도 손을 쓰지 못하는 유령 C를 위치시킨다. M의 손은 파이를 먹느라 몹시 바쁘지만, 그 행동을 보면서도 움직이지도 소리를 내지도 못하는 C의 상태 때문에 마치 정지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옛날 브라운관을 보는 듯한 1.33:1의 사각 프레임 안에 놓인 두 연인의 모습이 거대한 미술관 속 한 장의 사진처럼 치환된다. 영화를 보는 관객 역시 숨죽이게 만드는 집약된 긴장의 순간이다.

영화의 틈 관련 이미지

공간이 이야기를 만든다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이 C가 있는 이 쓸쓸한 교외의 풍경을 담기 위해 불러온 이미지는 미국 사진작가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작품이었다. 미국 교외의 전원주택, 평범한 중산층의 이미지를 포착해내는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작업은 그 소재의 평범함과 달리, 한 번 보면 결코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기괴한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영화를 사진으로 옮겨온 듯, 이미지는 이미 일어난, 혹은 곧 일어날 사건의 분위기로 팽배해져 있다.
식탁 앞에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남과 여는 따뜻함보다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며, 어두운 밤 집 앞에서 어떤 광선 아래 서 있는 남자는 SF적인 기괴함에 노출된다. 슬립을 입고 푹 꺼진 거실 바닥 한가운데 누워 있는 여자의 모습은 그 자체로 어떤 사건의 전말을 예측하게 만든다. 문이 열린 채 전봇대 앞에 서 있는 차, 욕조에 우두커니 몸을 담그고 있는 여성 등 크루드슨이 포착한 인물들은 공간의 조명과 인물의 표정만으로도 결코 평범하지 않게 작화된다. 흘긋 보고 지나치지 않고 사뭇 유심히 관찰하면, 공간 속에 있는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씩 의미를 가지고 감지된다. 마룻바닥에 널려 있는 파편이나 발밑의 피 같은 얼룩 등은 스토리를 예측하는 촉매제가 된다. 크루드슨의 사진작업이 이렇게 스토리를 가질 수 있는 건 그만의 특이한 작업방식에서 비롯되었다. 촬영팀을 구성하고 장면을 연출한 후 후반작업을 통해 수정하고 편집하는데, 이는 영화 촬영과 거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미국 교외의 중산층이라는 현실적인 바탕 위에, 마치 가상의 사건이나 SF적인 순간을 접목시키는 방식이다.
모노톤에서 벗어난 강렬하고 다양한 색채의 배열, 사물과 인물들의 배치를 통해 우리는 즉각적으로 신문에 날 법한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으리라 예상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익히 아는 교외의 하루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 센 충격 뒤에 다가오는 정서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배경의 한 구석에 위치한 삭막하고 고독하며 권태롭기까지 한 인물들의 심상이다. 이렇게 정적인 가운데 공포의 스토리를 내포한 크루드슨의 사진을 보고 난 후 다시 돌아와 <고스트 스토리>를 보면, 영화의 많은 장면이 크루드슨이 묘사한 적막한 기운으로 둘러싸여 있음을 느끼게 된다. <고스트 스토리>는 어쩌면 크루드슨의 사진에서 ‘데이비드 린치’적인 충격적인 사고와 사건이 지난 후의 정서적 상실을 묘사한 작품일 것이다. 갑작스런 차 사고라는 비극적 사건 이후, 이제 생을 떠나야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선뜻 떠나지 못하는 C의 유령. 그의 슬픔이 이 공간의 우울한 이미지 안에서 한층 더 깊게 여운을 남긴다.

글 이화정_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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