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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2월호

성공회성당과 세실극장 고요함 가운데의 강인함
영화 <1987 >이 화제다.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이 통하던, 아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시대의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게는 아픈 기억으로, 누군가에게는 충격적인 과거로 다가온다.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유시민 작가는 “‘21세기의 종묘’는 종로5가의 한국기독교회관, 정동 성공회성당, 그리고 명동성당”이라고 말했다. 민주화 운동의 성지가 된 종교기관들, 그 가운데 덕수궁과 서울시의회 사이에서 100여 년의 시간을 고요히 견딘 성공회성당이 있다. 붉은 지붕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소박하고도 단아한 건물이 품은 100년의 시간.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보자.

서울 건축 읽기 관련 이미지1 1926년 신축된 이후, 1996년 지금의 형태로 완성된 성공회성당.
2 사제관과 뒤편의 수녀원, 사제관 앞에는 6월항쟁 기념 표지석이 있다.

19세기 말 변화의 중심, 정동

1882년 외국인들의 한성부 내 거주가 허가된 이후, 정동 일대에는 서양 각국의 공사관이 자리 잡았다. 지금의 정동길은 ‘공사관 거리’(Legation Street)라고 불릴 정도로 길을 따라 공사관들이 줄지어 들어섰고, 공사관 이외에도 배재학당, 이화학당, 보구여관, 시병원, 정동교회 등 서양인들이 설립한 학교와 병원, 교회 등이 자리 잡았다. 또한 덕수궁 대한문 앞에는 서양 잡화를 파는 잡화점이나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호텔이 들어섰다. 1880년대 중후반 공사관을 비롯한 서양식 건축물들이 정동에 등장하며 단층한옥이 대부분이었던 서울의 풍광은 역동적으로 변해갔다.
지금도 정동은 이국적인 분위기가 가득하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배재학당, 정동교회, 이화여고, 신아빌딩과 같은 붉은 벽돌의 서양식 건축물들이 눈에 띈다. 19세기 말 지어진 공사관들은 현재 대부분 사라졌으나, 러시아 공사관의 탑과 덕수궁 북쪽 언덕 숲속의 영국 공사관은 여전히 당시의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성공회성당과 그 주변

정동길 주변으로는 주로 미국 선교사들이 활동한 교육·종교 시설들이 자리 잡았고, 덕수궁 북쪽으로는 영국 공사관과 영국 국교인 성공회성당이 자리 잡았다. 정동 4번지에 영국 공사관이 지어진 건 1884년, 성공회성당의 전신인 장림성당이 정동 3번지에 들어선 것은 1890년의 일이었다. 장림성당이 이곳에 세워지며 공사관과 성당 사이에는 여학생 기숙사와 남학생 기숙사가 각각 1913년, 1914년, 붉은 벽돌 벽 위에 한옥 지붕을 올린 절충식 한옥으로 지어졌고, 이는 현재 성가수녀원 및 사제관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붉은 벽돌에 원형 아치를 사용한 단아한 성공회성당(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건물을 지은 건 1926년의 일이었다. 하늘로 높게 솟아오르는 고딕 성당 양식이 아닌, 한국식이 절충된 로마네스크 성당 양식은 성공회성당의 특징이다. 다른 성당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아하고 소박하게 지어졌지만, 종탑에 오르면 덕수궁을 비롯한 서울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성공회성당은 신축 당시 일대의 랜드마크 같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내 주변에 높은 탑을 가진 부민관(1934년 준공, 현재의 서울시의회), 조선체신사업회관(1937년 건립, 2015년 철거된 남대문 국세청 별관), 조선일보사(1934년 준공, 현재는 철거) 등이 들어서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더 높은 대형 업무 빌딩들이 들어섬에 따라 성공회성당은 덕수궁, 영국 공사관 등과 함께 정동 내부의 섬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서울 건축 읽기 관련 이미지3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배치된 단순한 매스의 세실극장.
4 세실극장의 입구.

한국전쟁과 민주화 운동, 그리고 세실극장

성공회성당의 앱스(apse, 기독교의 교회당에서 밖으로 돌출한 반원형의 내진부) 부분 아래에는 총탄 자국이 있다. 또한 사제관 앞에는 6월항쟁을 기념하는 표지석이 있다. 종교 건축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 흔적들은 성당이 지나온 시간들을 보여준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신부와 수녀, 성도들의 피랍과 순교 등이 잇따랐고, 퇴각하던 인민군들이 성당에 기관총을 난사하여 앱스 외벽에 총탄을 남긴 것이다.
피랍되었던 세실 쿠퍼(구세실) 주교는 전쟁 이후 돌아왔고, 성당은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고 1976년에는 세실 쿠퍼를 기념하기 위한 세실극장이 지어졌다. 건축가 김중업의 설계로 1976년 준공된 이 건물은 연극인회관으로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 연극제가 처음으로 개최된 한국 연극의 중심지였다. 연한 회갈색 벽돌로 덮인 세실극장은 이탈리아 도시에서 볼 법한 성공회성당을 주인공으로 두고, 그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성공회성당의 배경이 되어 조용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대지에 조용히 대응하듯 배치된, 세실극장의 단순한 매스는 지나가는 이들을 계단으로 유인하여 안으로 끌어들이는 듯하다.
1987년 6월 10일 오후 6시. 성당의 나지막한 종탑에서 종소리가 울렸고, 이 종소리와 함께 도로를 메운 차들은 경적을 울려댔다. 6월항쟁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6월항쟁을 이끌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인사들은 세실극장의 지하 레스토랑에 숨어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민주화를 위해 싸운 젊은이들을 품어주었던 성당과 극장은 지금도 고요히 그 자리에 서 있다. 2015년 남대문 국세청 별관의 철거 이후 성당은 대로변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고, 덕수궁과 영국 대사관 사이의 길이 개방됨에 따라 이 주변은 좀 더 친숙하게 접근 가능한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세실극장은 운영난으로 인해 2018년 1월 문을 닫았다. 세실극장의 폐관은 대한민국 연극의 중심지였으며, 1987년 민주화 운동의 성지였던 이곳의 시간과 의미까지 사라지게 만드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세실극장의 시간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은 진정 없을까?

글·사진 이연경_ 연세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건축역사이론 전공으로 석·박사를 취득했다. 한성부 내의 일본인 거류지에 대한 박사논문으로 제6회 심원건축학술상을 수상하였으며 한국도코모모, 도시사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성부의 ‘작은 일본’ 진고개 혹은 本町>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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