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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2월호

소설가 한창훈의 스무 살 서울오래전 모래내시장
소설가 한창훈이 스무 살이었던 때, 난생 처음 올라온 서울에서 지낸 곳은 남가좌동 모래내시장이었다. 친척 아주머니의 집에서 묵으며 종로에 있는 학원을 오갔던 그 시간 동안, 시장 주변에서 소시민의 삶을 이어가는 다양한 이들을 만났다. 그들의 얼굴은 잊었지만, 그 시간을 추억하며 지금도 모래내시장을 기웃거리곤 한다.

서울 단상 관련 이미지1~3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살았던 모래내시장. 요즘도 자주 찾는 곳이지만 예전에 머물던 그 집을 찾을 수가 없다.

복닥복닥 남가좌동 사람들

1982년 1월. 역사와는 상관없이 나에게 커다란 일이 생겼다. 처음으로 서울 땅을 밟은 것이다. 종로에 있는 학원 비슷한 곳에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저 남쪽 여수에서 6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왔다.
배웅 나온 친척 아주머니는 나를 데리고 낡고 어두운 시내버스에 타더니 한참 뒤 남가좌동 모래내시장에서 내렸다. 시장을 끝까지 가로지른 다음 기다란 골목을 파고들었고 종내는 골목인지 복도인지 구분이 안 가는, 길쭉한 공간의 끝, 어둑어둑한 단칸방에 도착했다. 친척 아주머니는 라면을 끓여주었고 식은 밥도 퍼왔다. 그게 서울에서의 첫날이었다.
방이 이어져 있던 그곳에는 이런저런 사람들이 그렇게 줄지어 살고 있었다. 신발을 신고 다니는 그곳이 복도인지 골목인지 그들도 잘 몰랐다. 나는 학원 비슷한 곳에서 무언가를 배운 다음 탑골공원과 인사동 거리, 세운상가 따위를 싸돌아다니다가 늘 저녁시간에 맞춰 돌아왔다.
문제는 친척 아주머니가 춤바람이 났다는 것이었다.(남편은 무슨 일로 지방에 가 있었다.) 그거야 그녀 스스로의 문제니까 상관없다 쳐도, 내가 도착하면 여섯 살짜리 아들놈만 우두커니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진짜 문제는 아주머니가 카바레에 가면서 옆방 처녀에게 아들과 나를 챙겨달라고 부탁했다는 것.
밥 먹을 때 그 처녀가 찾아와 앞에 앉아 있었다는 소리다. 그 시절엔 그런 풍경이 드물지 않았다.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물을 얻어먹을 수 있었으니까. 이름이 뭐냐, 여섯 살짜리 아이하고는 어떤 관계냐, 서울엔 왜 왔느냐, 이런 것들을 물어오던 그녀는 밥상을 물린 다음에도 가지 않았고 나도 비슷하게 묻지 않을 수 없어서 이야기는 길어졌는데, 그러다 보니 소주를 사와 마시는 지경까지 가곤 했다. 그녀는 고향이 충남이었고 나보다 한 살 많은 재봉사였다. 알고 보니 아주머니의 춤바람은 이력이 높았다. 자주 ‘출정’했다는 소리다. 그것은 옆방 처녀가 그 횟수만큼 내 앞에 앉아 있었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녀의 얼굴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별다른 일이 없었으니까. 훗날 아주머니는 옆방 처녀와 어떻게 해보라는 의도였다고 말했다. 둘이 연애를 걸면 자신의 춤바람이 묻히는 효과가 있을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때 막 스무 살이었고 카바레에 대한 인식이 몹시 좋지 않았다. 모든 탈선과 가정 파괴의 원흉이 그거라고 <선데이서울>과 <주간경향>에 빠지지 않고 나올 때였다. 그래서 밤늦게 돌아온 친척 아 주머니를 앉혀두고 취한 주제에 되도 않게 잔소리를 해보기도 했는데 그래봤자 하루 정도 쉰 다음 그녀는 또 나갔다. 한 번은 낮 시간에 곱게 생긴 새댁이 갓난아이를 안고 놀러 왔다. 두 여인네는 대낮인데도 나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들어보니 새댁은 카바레 동기였고 춤바람이 들통 나는 바람에 시어머니가 갓난아이를 맡아주지 않아서 이렇게 애나 본다고 나에게 하소연했다.
그 세계에도 우정은 존재했다. 아주머니가 남자 역할을 맡아 둘이서 지루박을 한 번 ‘땡긴’ 것이다. 아이를 받아 안고 있던 나는 며칠 전 잔 소리했던 것은 잊어버리고 멍하니 그 춤을 바라보았다. 춤이라는 게 나름 법도가 있으며 제법 맵시까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소증(素症)환자 병아리라도 쫓아다니면 좀 낫다’는 말대로 새댁은 어느 정도 해소된 얼굴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 속의 그 얼굴

내가 기억하는 얼굴은 주인집 며느리이다. 재봉사 처녀의 옆방은 제법 컸는데 주인 아들이 따로 쓰고 있었다. 주인집은 내부에서 철제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2층이었다. 아들은 요새 기준으로 하면 ‘인간말종 금수저’였다. 부모 돈 믿고 아무 일도 안 했다. 술 마시고 화투 치느라 통행금지가 끝나는 오전 4시 이후에 들어오는 게 일과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며느리가 2층에서 내려와 밥 먹으라고 남편을 깨웠다. 조금 뒤 듣기에 민망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아들은 담배를 문 채 2층으로 올라갔고 곧이어 시어머니가 쫓아 내려와 며느리에게 한바탕 퍼부어댔다. 밥상 차려 놓고 여기서 도대체 뭐 하고 있느냐고. 무슨 상황인지 다들 아실 것이다. 요지는, 그 며느리는 툭하면 그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고, 시어머니가 아들에게는 한 마디도 안 한다는 것이고, 그리고 민망한 소리가 길지 않았다는 것이다.
며칠 뒤 며느리는 나에게 나이와 고향을 물었고, 제법 오랫동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고향이 경상도이며 전라도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사람과 내가 제법 닮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남자와 헤어진 것을 후회하고 있으며 그 남자를 찬 죗값을 지금 받고 있다고 말했다.(전라도 남자의 가난, 지금 시댁의 재산 따위가 말 사이에 나왔다.) 그녀의 한탄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나는 지금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지내고 있다. 모래내시장이 가까워 자주 가곤 한다. 얼마 전에는 고들빼기김치를 사왔다. 매번 골목마다 기웃거려보곤 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그 집은 찾지 못했다.

글·사진 한창훈_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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