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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4월호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문을 듣고 밥 딜런이 문학이듯 결정문도 문학이다
2017년 3월 10일 금요일 11시.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읽어 내려가는 탄핵 결정문에 쏠렸다. 고비도 있고 반전도 있던 탄핵 결정문은, 완벽한 기승전결의 구조로 한 편의 문학작품이 되기에 충분했다.

고재열의 썰 관련 이미지1 3월 10일,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을 선고했다. ⓒ한겨레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사건 개요-사건의 발단’을 시작으로 덤덤하게 결정문을 읽기 시작했다. 이 권한대행은 박근혜 대통령(피청구인) 대리인 측의 탄핵 심판 절차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나하나 기각했다. ‘소추 사유의 특정 여부’ ‘국회 의결 절차의 위법 여부’ ‘8인 재판관에 의한 탄핵심판 결정 가부’에 대해 대리인측이 주장한 내용을 전부 논박하고 “피청구인의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밝혔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하지만 구체적인 탄핵 사유로 들어가자 “소추 사유로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말이 계속 나왔다. ‘공무원 임면권 남용 여부’ ‘언론의 자유 침해 여부’ ‘생명권 보호 의무’와 관련해서는 대통령을 탄핵하는 사유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계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 권한대행의 입에서 ‘그러나’가 연거푸 나오면서 각하 혹은 기각의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 번의 ‘그러나’에 국민들의 긴장이 한껏 고조되었을 무렵 이 권한대행의 목소리가 준엄해졌다. 그리고 “피 청구인의 이 사건 헌법과 법률 위배 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행위로서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피청구인의 법 위배 행위가 헌법 질서에 미치게 된 부정적 영향과 파급 효과가 중대하므로, 국민으로부터 직접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은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대통령 파면에 따르는 국가적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고 인정된다”라고 또렷하게 읽었다.
결정문을 읽기 시작한 지 21분이 되었을 무렵 이 권한대행의 입술이 잠시 긴장했다. 그리고 조용히 결론을 읽어 내려갔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긴 탄핵 국면이 비로소 끝나는 순간이었다. 탄핵 인용까지의 긴 과정을 생각하면 허무할 정도로 짧고 건조한 결말이었다.

고재열의 썰 관련 이미지2 인터넷 서점 알라딘은 헌법재판소가 선고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결정문 전문을 전자책으로 제작, 무료로 배포했다.

논리적 해석을 바탕으로 한 문학작품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은 A4 용지 89쪽으로 중편소설 정도의 분량이었다. 고비도 있고 반전도 있는 이 결정문은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 한 편의 문학작품이었다. 밥 딜런의 노래가 문학작품으로 인정받았듯 이 결정문도 ‘권선징악’을 막강한 논리로 풀어낸 문학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문학이 아니면 무엇이 문학이란 말인가? 가장 절제된 언어로 감정의 소용돌이를 극대화했다.
절묘한 결정문이었다. 지극히 보수적인 법의 논리를 전제로 시작했지만 지극히 현실적이고 희망적인 결론으로 끝을 맺었다. 무엇보다 국가 시스템이 붕괴된 국정 농단 사건을 국가 시스템에 의해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데 의미가 있다. 결정문은 법이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이 대목이 주목할 만하다. “이 사건 탄핵심판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적 가치를 실현하고 헌법 질서를 수호하는 문제이다. (중략)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헌법적 가치와 질서의 규범적 표준을 설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명쾌한 결론으로 가기 위해 재판관들은 진실을 꾹꾹 눌러 담았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 대통령을 탄핵할 만큼 중대한가?’ 거듭 되물었다. 많은 국민들이 의아해하는 부분은 ‘세월호 7시간’의 대통령 행태를 탄핵 사유로 보지 않은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이 부분이 가장 결정적인 ‘법관의 한 수’로 볼 수도 있다. 재판관들은 박 전 대통령이 “국가공무원법상의 성실 의무를 위반했다”라고 보았다. 그러나 “대통령의 성실 의무 위반을 일반적 파면 사유로 볼 경우 사소한 성실 의무 위반도 파면 사유가 될 수 있다”라며 행여 나중에라도 이 결론이 악용될 수 있는 상황을 우려했다.
대신 김이수, 이진성 두 재판관이 보충 의견에서 박 전 대통령의 불성실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꾸짖으며 명백히 잘잘못을 가렸다. “국가 최고 지도자가 국가 위기 상황에서 직무를 불성실하게 수행하여도 무방하다는 그릇된 인식이 우리의 유산으로 남겨져서는 안 된다. 대통령의 불성실 때문에 수많은 국민의 생명이 상실되고 안전이 위협받아 이 나라의 앞날과 국민의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불행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므로 우리는 피청구인의 직책 수행 의무 위반을 지적하는 것이다.”
안창호 재판관은 보충 의견을 통해 건조한 결정문에 낭만을 보충했다. 그는 “통치하는 것이 쟁취의 대상이 되면, 이는 동족 간의 내란으로 비화하여 당사자들은 물론 다른 시민들마저 파멸시킨다”라는 플라톤의 <국가>와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어다”라는 성경 아모스 5장 24절을 인용했다. 특히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국민의 열망을 결정문 안으로 끌어들이며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나타난 시대정신은 분권과 협치, 투명하고 공정한 권력 행사로 나아갈 것을 명령하고 있다”라고 말한 부분이 돋보였다.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은 모든 구절이 좋았다.

글 고재열_ 시사IN 편집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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