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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2월호

영화 칼럼니스트 김정원의 만리동 추억고개턱에 숨어 시간을 버티는 동네 만리동
필자는 강남에서만 직장 생활을 하다 직장을 옮기면서 만리동에 터를 잡았다. 미숙련 노동자와 기묘한 메뉴를 내놓는 가게들, 살기 팍팍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금까지 보지 못한 서울의 다른 속살을 보았다. 칼럼니스트 김정원이 털어놓는 10여 년 전 만리동에 대한 추억이다.

서울 단상 관련 이미지

기사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팀장이 웬 창고 같은 건물 앞에서 말을 걸었다. “너, 저기 가서 월급이 얼만지 한번 물어볼래?” 그가 말한 ‘저기’에는 이런 쪽지가 붙어있었다. ‘미싱 시다 모집’. 이게 뭐지, 지금은 2002년인데, 갑자기 전태열 열사가 그토록 갖고 싶었다던 대학생 친구라도 돼야할 것 같아, 어차피 대학생도 아니지만.
청담동과 논현동에서 몇 년을 일하며 8,000원짜리 스트로베리 바나나 생과일 주스 (그러니까, 지금 말로 하면 ‘딸바’ 주스지만 그때는 매우 트렌디한 음료) 따위를 마시다가 만리동으로 직장을 옮긴 나는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그딴 게) 왜 궁금한건데요.” 팀장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노동자의 현실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지 않겠니?” 이게 뭐지, 지금은 2002년인데, 80년대 학번 운동권이 문건이라도 읊어주는 것 같아, 아 80년대 학번 운동권 맞지.

상상도 못했던 서울의 또다른 속살

만리동은 그런 곳이었다. 고갯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시간을 함께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풍경이 바뀌던 곳, 20평대 전세가 몇 억이 넘는 아파트를 지척에 두고, 가건물보다도 못한 창고에서 미숙련 노동자들이 실밥과 먼지를 마시던 동네였다.
그때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짜리 방에서 자취를 하던 선배는 아직도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이제 괜찮은 오피스텔을 얻어도 되겠지만, 선배가 나가면 그 월세가 유일한 수입인 주인 할머니가 새로운 세입자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착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는 착한 사람들도 그 동네에 살지 않는다.
5년간 만리동에서 일하며 나는 서울살이 10년이 가깝도록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을 숱하게 봤다.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그 동네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술집 주인은 통닭과 회를 같이 파는 파격을 시도했다는 (처음엔 동료들이 횟집 가서 닭 튀겨달라고 진상 부리는 줄 알았다) 자부심 가득한 아저씨였는데, 이후 구워주는 삼겹살로 메뉴를 확장하면서 만리동 술집의 역사를 다시 썼다.
처음 보는 화장실도 있었다. 재래식 화장실쯤은 각오하고 있었지만, 커다란 나무 상자에 구멍을 내고 거기에 변기만 붙여놓은 줄은 정말 몰랐다. 벌써 찰 대로 찬 상자에 새로운 소변을 공급하고 있노라니, 아아, 소리가 깊구나. 몇 년 뒤 만리장성에서 비슷한 화장실을 발견한 나는 감탄했다, 대륙의 그것에도 뒤지지 않는 만리동의 패기. (그러고 보니 둘 다 ‘만리’ 자 돌림… 미안.)
어쨌든 그 후로 나는 참을 만큼 참다 회사로 달려가 볼일을 봤고,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도 사원증을 요구하던 야간 경비 아저씨하고 안면을 텄다. 청담동 화장실에는 헤어 드라이어랑 왁스도 있는데, 이게 뭐야.

서울 단상 관련 이미지

살기 팍팍한, 다양한 사연의 사람들이 웅크려 살던 곳

하지만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들도 있었다. 값이 싸고 기본 안주가 좋아서 자주 가던 연탄구이 고깃집에서였다. 시간이 늦어 손님은 우리뿐이었다. 심혈을 기울여 삼겹살을 열 맞춰 정돈하고 있는데 술 취한 50대 아저씨가 들어와 연탄집게로 드럼통을 패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번도 경찰에 신고해본 적이 없는 나는 휴대폰을 꼭 쥐고는 긴장해서 속삭였다. “그냥 112 누르면 되나?” “놔둬, 아줌마 남편이야.” 선배는 소주를 한잔 마시고는 덧붙였다. “그냥 같이 사는 거일 수도 있고.”
알고 보니 내가 몇 달간 날이면 날마다 술을 퍼마시던 대로변 통닭집, 슈퍼 옆 횟집, 횟집 옆의 바로 그 슈퍼, 고개 위 다른 통닭집 (그 시절 나는 날마다 통닭과 회만 먹었던가 보다…) 주인 아줌마들이 모두 그렇게 살고 있다고 했다. 전부 부지런하고 친절하고 장사도 잘하는데, 그 아줌마들이 왜요? 선배는 다시 술을 한잔 마시고는 말했다. “그렇게라도 누구랑 같이 사는 게 좋은 거지.”
그 선배는 오르막길을 매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인생이 평생 내리막… 아, 미안.) 회사가 이미 고개턱에 있는데 구태여 다시 험한 길을 갈 필요가 있겠느냐는 거였다. 그런 선배가 후배들을 끌고 고개를 올라 새로 생긴 꼼장어(먹장어) 집에 갔다. 상당히 맛이 없었다. 나는 분노했다. “500g 감량이 절실한 이 시국에 이런 맛없는 걸 먹고 1kg 찌면 선배가 책임질…” 선배는 내 입을 막았다. “여기 주인이 ○○○ 출신이야.”
나는 그냥 입을 닫고는 마음먹고 해도 이렇게는 못할 거 같은 양념 꼼장어를 꾸역꾸역 먹었다. 꼼장어에는 소주인데, 소주보다 비싼 병맥주도 많이 마셨다. 그는 몇 십 년 전 독재 정권에 저항한 지하 조직의 조직원이었다. 그리고 몇 번 가지도 못했는데 그 집은 문을 닫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절 만리동은 시간을 거스른다기보다 시간을 버티는 동네였는지도 모른다. 숙명여대에서 올라가고 공덕역에서 올라가고 서부지검에서 올라가면, 그 모든 동네의 변화가 미치지 못하는, 숨이 차는 고개턱에 만리동이 있었다. 앞으로만 달려가는 시간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던 이들이 가파른 고개턱에 둥지를 틀고 앉아 언젠가 덮쳐올 변화에 먹힐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전, 거의 10년 만에 만리동에 갔다. 서울의 동네 대부분이 그렇듯 이제는 고층 빌딩으로 뒤덮여 낮은 곳에 있던 모든 흔적이 사라진 그 동네에서, 책으로만 알던 대포 한잔을 처음으로 마셔본 이름 없는 오뎅집이 아직 웅크리고 있었다. 대낮이었지만, 나는 작게 빛나는 빨간 간판을 보았던 것도 같다.문화+서울

김정원 칼럼니스트, 영화에 관한 글을 쓰고 잡지를 만든다.
그림 M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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