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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호

시집 <눈먼 자의 동쪽>과 소설 <바르샤바의 열한 번째 의자> 겨울로 떠나는 따뜻한 여행
한 나그네가 칼바람 부는 겨울에 어깨 웅크리고 객지를 지나간다. 냉기가 옷 속으로 들어오는 걸 막으려고 코트 깃을 단단히 여민다. 그때 나그네는 길가의 집에서 따뜻한 모닥불 빛이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걸 본다. 창 안을 들여다보니 온 가족이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한겨울에 어디선가 있을 법한 광경이다. 한편으로는 황량하고 한편으로는 따뜻한, 겨울의 두 모습을 각각 보여주는 책을 소개한다. 오정국 시인(한서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의 시집 <눈먼 자의 동쪽>과 김다은 소설가(추계예술대 문예창작과 교수)의 장편소설 <바르샤바의 열한 번째 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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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연하고 황량한 겨울을 담은 한 편의 여행기 같은 시집
<눈먼 자의 동쪽>, 오정국 지음, 민음사

오 시인의 이번 시집은 한 편의 여행기다. 그가 직접 한겨울에 내 설악(강원도 인제군과 가까운 설악산 지역), 비슈케크(키르기스스탄의 수도), 제주도를 여행하며 지은 시들을 모았다. 시집은 강원도의 굽이친 계곡 어느 구석에 숨어 있을 법한 터널에 대한 시로 시작된다. 그가 보기에 해 질 무렵의 터널은 산속에 조용히 웅크린 산짐승 같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끌려가는 저녁 해가 있다 그리하여 / 고요하게 입을 다무는 터널 // (중략) // 터널 밖에는 / 눈이 녹는 철길이 있고 / 지평선을 딛고 저녁노을을 빛내 주는 햇덩이가 있는데”(‘터널 밖에는’ 부분).
이어 시인은 내설악을 여행하며 느낀 감상을 20편에 달하는 연작시 ‘내설악일기(日記)’로 풀어낸다. 내설악 주민의 삶, 도시에서 온 관광버스 행렬, 산짐승의 생존 분투기 등을 담았다. 그 중 단연 으뜸은 깊은 밤 황량한 설산 풍경에 대한 시다. “얼음장의 달빛들, 물고기 비늘처럼 / 퍼덕이더니, 고요로써 고요를 쓰다듬듯 / 고요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었다 / 오싹한 기운이 옆구리를 찔렀지만 / 귀기(鬼氣)서린 저 풍경이 / 이승의 한 조각 아름다움이라면”(‘목에 비수를 들이대듯-내설악일기·11’ 부분).
키르기스스탄이라는 이역만리 낯선 나라에서 시인은 다시 한 번 느낀다, 자연의 섭리가 칼날을 벼리고 있는 저곳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임을. “터무니없는 억측이 아니었다 지척 모를 안개가 / 산 계곡을 뒤덮어 세 번째 산행도 벼랑 끝에 서게 됐다 // (중략) // 여기까지 허락된 발걸음인 것 / 범접 못할 비경은 절대의 영역인 것”(‘어느 생의 언젠가를-비슈케크일기·5’ 부분). 시인은 작가의 말에서 “내 목숨의 허기를 좇아 참 많이 떠돌았다”며 “그 황홀하고 처연했던 중얼거림을 여기에 담는다”고 말했다.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식탁
<바르샤바의 열한 번째 의자>, 김다은 지음, 작가

김다은 작가의 소설은 폴란드의 크리스마스 풍습에 대한 얘기로 시작된다. 작가에 따르면 폴란드 사람들은 온 가족이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저녁 식사 자리에 빈 접시와 빈 의자를 하나 갖다놓는다. ‘혹시 올지도 모를 사람’을 위해 마련해두는 여분의 자리다. 김 작가는 지난해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이 풍습에 대해 알게 됐다. 묵고 있던 숙소의 주인이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식사에 초대해 실제로 이 ‘빈 자리’에 앉았다. 당시 받았던 감동이 이 소설을 쓰는 계기가 됐다.
소설의 주인공인 폴란드 할머니 아네타는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면서도 한 아이를 계속 기다린다. 아네타는 50년 전 폴란드 정부가 비밀리에 설립한 ‘프와코비체 양육원’에서 보육교사로 일한 적이 있다. 이 양육원은 당시 폴란드가 ‘사회주의 형제애’를 강조하기 위해 북한 전쟁고아를 데려다가 보살핀 곳으로 1950년대에 실존했다. 아네타가 기다리는 아이는 당시 보육원에서 만난 북한 소녀다.
한편 소설 속 한국 여성 리아는 “폐허가 된 영혼을 재건하겠다”며 폴란드에 간다. 한 공동묘지에서 우연히 아네타를 만나 그의 가족이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받는다. 이 자리에서 리아는 폴란드 특유의 ‘여분의 빈자리’에 앉는다. 아네타는 리아를 보고 양육원의 그 소녀가 돌아왔다고 믿는다. 아네타는 과거 보육원의 소녀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슬프고 아름다운 사연을 털어놓는다. 작가는 “전쟁으로 도시의 85%가 파괴된 바르샤바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들 속에 따뜻한 인간성이 있었던 덕분”이라고 말한다.

겨울 여행을 부추기는 문학

시를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요즘 유행하는 난해한 시를 애써 읽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잘 찾아보면 시에 익숙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많다. 오 시인의 시가 그런 작품 중 하나다. 힘을 빼고 천천히 읽으면 누구나 금방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다. 나와 코드가 맞는다면 시인의 감상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도 있다. 김 작가의 책은 가슴 뿌듯한 체험이 집필의 동기인 만큼 작품 전체에 따뜻한 기운이 서려 있다. 한 편의 크리스마스 미담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1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두 작품 모두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겨울 여행을 떠나고 싶게 한다. 오 시인의 작품을 읽으면 눈 덮인 황량한 산악 지역을, 김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 크리스마스 유럽의 아름다운 도시를 방문하고 싶어진다. 이 책들을 들고 겨울휴가를 떠나보는 것도 좋겠다.문화+서울

글 양병훈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사진 제공 민음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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