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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호

시인 고은 모국어의 영토 너머로 확장되는 시인의 영혼
지난 1월 11일 고은 시인이 이탈리아 로마재단이 수여하는 국제시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고은 시인은 2005년 노르웨이 비에른손 훈장을 시작으로 2008년 캐나다 그리핀 트러스트상, 2014년 마케도니아 스트루가 황금화환상과 이탈리아 노르드수드상 등 이미 해외에서 문학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바 있다. 팔순을 훌쩍 넘긴, 그러나 세계 문단에서 누구보다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고은 시인을 김형수 시인이 만났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

시가 반드시 글자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인의 구변(口辯)은 두고두고 작품을 압도한다. 고은 시인이 그렇다. 선생님을 만나면 일상의 언어들이 ‘사유의 향연’을 이루는 ‘말의 축제’를 경험을 하게 된다. 거의 3분에 한 번씩 전율할 듯한 생명 부호를 쏟아내는 것이다.
최근에는 그런 살아 있는 말이 유난히 그리웠다. 온 나라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걷잡을 수 없이 서쪽으로 떠내려가는 느낌이랄까, 날마다 문명의 석양 속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을 찾아뵙던 날, 동행한 후배 안현미 시인이 어수선한 세밑에 블랙리스트 문제로 선생님이 일갈한 인터뷰 기사를 상기시켰다. 다들 ‘한 번도 국민이 돼본적이 없는, 시민적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어서 야기한’ 경박한 시대를 걱정하고 지나갔다.
나는 고은 선생님의 수사법에 꽤 단련된 편에 속했다. 몇 년 전 어느 일간지에서 1년간 대담을 연재해 <두 세기의 달빛>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고, 작년에는 한 계간지에 ‘고은 깊은 곳’을 탐구하는 대담을 세 차례나 게재하기도 했다. 사실, 고은 시인에 대한 이야기는 시대를 풍미할 만큼 범람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거기에 한 가지 빠뜨린 내용이 있다는 미련을 버릴 수 없었다.
“선생님! 지상에서 누리는 개개인의 삶이 국경을 넘은지 오래인데, 한국문학은 아직 ‘모국어 너머’에 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국제활동에 대해 인식할 틀이 제공되지 않은 셈입니다. 언론도 선생님의 20여 년을 ‘여러 나라의 행사에 초대받아서 외유한 시기’ 정도로 인식하고 맙니다.”
나는 이 같은 문제의식의 타당성을 전혀 의심치 않았다. 한 시인의 정신세계가 모국어의 영토를 차고 넘쳐서 여러 대륙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무슨 ‘국제적 이벤트에 참여하는 여가활동’ 쯤으로 여기는 건 얼마나 단견인지 모른다. 한국의 미디어들이 ‘지구촌 문단에 속한 고은’을 읽으려면 당대 문학이 불시착해 있는 현장이 반드시 언급되어야 한다. 선생님이 한참 만에 입을 열어 이야기 마당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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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나 소설가가 모국어에 대한 강한 애착을 자신의 원칙으로 삼는 것은 결코 함부로 내팽개칠 수 없는 근원적 자세 아닌가.

한국 문단이 ‘타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소위 ‘세계화 시대’가 논의 되기 시작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다들 지구촌 시대의 민족문학을 고민하던 때 선생님은 이미 모국어 너머에서 문학활동을 펼쳐가고 있었습니다. 첫 풍경이 어땠는지 듣고 싶습니다.

여권이라는, 해외의 특정 지역을 출입하거나 체류하는 정부 발행의 증명서는 나에게는 생소한 것이었네. 따라서 내 문학은 거의 숙명적인, 한반도 이남에서만 가능한 표현활동일 수 밖에 없었네. 이를테면 식민지 시대 초기의 이광수가 일본어로 첫 단편소설을 발표한 일이나 1930년대의 이상이 일본어로 시를 쓰는 일조차 1950년대의 나에게는 어림없었네. 그야말로 폐허에 남은 것은 상처 많은 모국어밖에 없었지. 그런 터라 세계라는 말은 지리학의 개념이기보다 ‘세상살이’의 삶 개념이기 십상이었어. 더구나 1970년대 이래 나는 이른바 반체제 진영의 반독재 저항과 표현의 자유를 주창하는 현실참여 노선을 내 일상으로 삼아오는 동안 여권 발부의 금지 대상자로 굳어졌네. 1980년대 후반에 미국 버클리 대학의 한 국제포럼에서도 미 국무성의 지원으로 1회용 임시여행 증명서를 얻어서 다녀온 적이 있을 뿐이네. 그러다가 1990년대 초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자 내란음모죄, 계엄령 위반, 계엄교사 등의 전과자 신분이 사면되어서 비로소 ‘양민(良民) 신분’을 회복해서 여권이 나왔네. 그 이래 20여 년의 해외 초청이 세계 각지에서 연달았어. 지금까지 100회 이상, 한 해에 10회 이상 초청받는 일도 있는데, 대체로 5회 6회 정도 초청에 부응하는 형편이네. 어쩌면 지난 시대의 출국금지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것인가 하고 여기네.

영화나 음악, 미술이 국경을 넘는 것과 문학이 국경을 넘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언어의 장벽은 높으니까요.

문학은 언어라는 경계에 원천적으로 구애받는 고유성으로부터 아직껏 함부로 일탈할 수 없다네. 지금은 현저하게 줄었지만 시인이나 소설가가 모국어에 대한 강한 애착을 자신의 원칙으로 삼는 사실은 결코 함부로 내팽개칠 수 없는 근원적 자세 아닌가. 그러나 한편으로는, 현대가 아닌 고대에도 세계는 미지의 장소를 모험하려는 본능이 있었네. 인류의 원조가 저 아프리카 1명 단위의 자연취락에서 100명 단위의 선발된 남녀로 세계 각 지역으로 산개해온 인류사 자체가 어디로부터 어디로 가는 고역을 마다하지 않은 것 아닌가. 그래서 ‘나’라는 유전인자 속에는 수많은 지역과 장소의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누적된 하나의 ‘세계’가 들어 있을 것이네. 남미 원주민과 몽골인의 동질성을 생각해보세. 인간뿐이 아니네. 아르헨티나 원산의 꽃이 아주 오래전에 동북아시아 농경사회에 와서 옥잠화라는 조선 여인의 표상이 된 것을 생각해보게. 제주도의 문주란은 일본 규슈 지방에서는 ‘하마유’라 하지. 그 꽃은 저 남아프리카 연방의 원산지에서 인도양 서태평양의 몬순 해면을 떠다니다 표착한 긴 여로 끝에 토착 식물이 되었다네. 어찌 이것뿐인가. 중국 자기가 로마로 건너가고 드디어 영국이라는 섬에까지 건너가 그곳의 자기로 명성을 떨치지 않는가. ‘본 차이나’라는 이름에 그런 역사가 들어 있겠지. 아니 히말라야 남쪽의 불교가 서북인도 간다라를 경유, 실크로드를 거치는 동안 대승불교의 중국에서 한국 일본으로 건너오는 일은 무엇인가. 아니 범어나 필리어가 중국 문화로 옮겨져 동아시아 불교가 성립되었네. 닫힌 농경사회에도 불구하고 자아는 끊임없이 세계를 갈망하고 세계 속에서 자아를 다시 강화했네.

선생님처럼 투옥 경험을 가진 저항적 정신들은 해외로 소개될 때 당국의 방해를 받았는데요?

그랬네. 그런데 폭력 체제에서의 저항에는 해외의 가능성 따위를 오히려 사절하는 독자성도 들어 있었네. 양담배를 미국으로 여기고 특히 1950년대 이래의 ‘양공주’를 그들의 고초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소외시킨 것도 일종의 배타적인 자아폐쇄에서 나왔어. 실제로 나도 1970년대 말이나 1980년대에 외국 후원단체의 지원금도 거절하는 ‘순수민족주의’를 문학운동과 사회운동에 적용했지. 하나의 근본주의였네.

눈물겨운 일은 수난 속의 쿠르드족 쿠르드어로도 시가 번역되었다는 점이네.
그 피어린 독립운동 중에서도 동아시아 시를 찾는 것은 너무 감동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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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람됩니다만 한국의 언론에서는 ‘노벨문학상 후보’라거나 외국의 문학상 수상 소식이나 전할 때 언급합니다. 여러 대륙의 축제나 회합 등에 초대받는 가십거리 내용을 전하다 보면 한국 시인이 국제문단에서 놓인 자리를 놓칠 수밖에 없어요. 선생님은 그간 해외에서 어떤 활동을 해오셨습니까?

20년 이상 된 활동을 일목요연하게 간추릴 수는 없네. 내 창 비의 한글 홈페이지(goo.gl/jx46nN)나 한국문학번역원 영문 홈페이지(library.klti.or.kr/node/9)를 보면 거기에 정리된 사례들이 있어. 시 낭독 프로와 시론이나 내 사유 세계를 드러내는 인문학 포럼의 기조발제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있지. 재작년 가을에는 프랑스 미술대축제의 기조연설로 미에 대한 것도 발표하고 독일 종합지에는 철학적인 논제에도 참여했어. 일간지나 정기간행물의 특집 등에도 포함되고…. 또한 나는 세계 주요 국가 TV방송 인터뷰도 사양한 적이 없네. 내 탄생 80회 해당 해에는 독일 주요 신문에 80세를 축하하는 칼럼이 실리기도 했네. 독일 라디오도 내 특집이 있었고.

<만인보>가 프랑스 교과서에 소개되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 독자에게 국제 무대에서 있었던 문학적 발언, 작품 교류, 타 언어권과 형성된 동료관계 등을 소개해주실 수 있습니까?

아니, 프랑스에서는 사회과학고등연구원 박사학위로 ‘만인보 연구’가 있었고, 중고등 교재로 선정된 곳은 스웨덴이었네. ‘현대의 고전’ 시리즈로 토마스만의 장편과 내 ‘만인보’ 스웨덴어판 130여 편이었네. 그 밖에 내 시와 소설이 번역된 외국어는 27개 국어이네. 인도 남부의 타밀이나 아프리카 부족어, 그리고 저 우즈베키스탄어로도 번역되고 있네. 눈물겨운 일은 수난 속의 쿠르드족 쿠르드어로도 시가 번역되었다는 점이네. 그 피어린 독립운동 중에서도 동아시아 시를 찾는 것은 너무 감동적이네. 그리고 스위스 4개 공용어는 이탈리아어 독일어 불어와 한때 스위스 알프스 고산지대 엥가딘 지역의 로망스어가 있네. 고대 로마가 망할 때의 로마 상류층 난민들이 그곳에서 라틴어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이어지는 고어(古語)라네. 그 언어로 쓰는 시인과 조각가가 최근 나에게 내 시 한 편을 자기 시집 제사(題辭)로 쓰는 것을 승낙해달라는 편지를 보내왔네. 또 포르투갈 시인도 자기 시집에 내 시 한 편을 내세우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왔네.

선생님의 작품이 해외에서는 어떻게 평가받는지 궁금합니다.

해외에서 문학상도 몇 개 받았네. 캐나다 그리핀 트리스트 평생공정상은 세계 각국 원로 시인에게 주는 것인데, 나 이전에는 스웨덴 토마스 트란스프리메르이고 나 다음에는 독일 엔첸즈베르거이네. 다 나보다 연상이지. 미국의 존 애시버리도 있네. 이 상 말고 마케도니아 황금화환상과 이탈리아 페스카라 시 부문상, 노르웨이 비에른손 훈장, 올해 2월에는 이탈리아 로마재단 국제시인상 등을 받네. 이것들 말고도 유네스코 세계시 아카데미 창립회원이자 명예시인의 ‘시의 날’ 제정에 참여한 바 있고, 밀라노 안브로시이나 아카데미 정회원이네. 또 베네치아 대한 명예 펠로로 추대되었네. 나는 이제 세계의 여러 시인 축제에는 ‘명예시인’ 또는 ‘주빈시인’으로 좀 예우를 받고 있고 기조연설자가 될 때가 많네.

미국 시인들은 선생님을 ‘아시아의 비트제너레이션’으로 생각하죠? 저도 기억합니다. 1989년 선생님이 여의도 여성백인회관에서 미국 시인 앨런 긴스버그와 시 낭송을 하셨을 때 인상이 아주 강렬해요. 그때부터 국제적 문우 관계가 생겨난 거지요?

앨런 긴스버그는 나를 세계로 내세운 형제 시인이라네. 물론 그 직후는 미국 계관시인이던 로버트 하스였지. 하스는 내 시 세계를 ‘워싱턴포스트’에 썼고 또 북 리뷰 오프 뉴욕의 1면 전체의 장문으로 ‘만인보론’을 발표했네. 앨런 긴스버그는 개리 스나이더에게 한국에 가게 되면 고은을 만나보라 했어. 내가 뉴욕 행사가 끝나고 그곳의 긴스버그와 함께 있을 때 그는 그냥 뉴욕에서 서울로 가지 말고 캘리포니아로 가서 개리 스나이더를 만나라고 했어. 그런데 긴스버그가 죽은 뒤에야 내가 태평양을 건너가 버클리에서 그를 만났지. 두 시인 다 ‘비트’의 1세대였네. 그중 가장 젊었던 매클루이도 서부에서 사는데 내 시를 읽으려고 뉴욕까지 날아온 적이 있지. 비트와 내 선(禪)적 경험에는 일종의 혈연성이 없지 않아. 지금도 서부 시인들은 푸코 따위가 뭐냐, 태양과 파인트리가 우리 시의 이웃이야 하고 말하지. 그 밖에 세계 각국에 형제들이 있어. 스나이더는 ‘고은은 지구 저쪽의 형제 시인’이라고 하지. 프랑스의 미셸드기도 내 형제지. 남아프리카 시인 브래이든 브래이트 바하도 영혼의 혈친이라네. 죽은 스웨덴의 트란스트리메느도 내 스웨덴판 서시를 써주었네. 나를 위해 뇌졸중 뒤 왼손으로 피아노 연주를 해주었지. 멕시코 시인, 중국 시인들, 시리아 아도니스도 내 아랍어 시집을 다 찾아 읽었지. 폴란드 시인 수그보르스카야는 세상을 떠났고, 스페인의 시인 안토니오 콜리나스도 아우처럼 여긴다네. 최근에는 동유럽의 시인들과도 친밀하다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영어판 시선집 <Beyond Self> 출판을 기념해 샌프란시스코에서 개리 스나이더와 함께한 시낭송회(1997).

문학은 유구할지라도 문명의 형식에 따라 언어의 소통 방식, 매개 수단 등은 달라질 거라 생각합니다. 디지털 기기의 진전과 문학적 소통의 미래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가만두게. 실컷 희미해지다가 다시 소생하네. 시는, 또는 문학은 앞으로 몇 번의 문명 형식의 시련을 받을 것이네.

고은 시인은 올해 85세인데, 그 나이에 세계와 맞서서 ‘시대적 현역 상태’를 유지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표본 같았다. 내가 아쉬워하며 “선생님의 시를 사랑하는 각 대륙의 독자들에게 새해 인사를 전해주시라” 했더니, “2017년의 행성 위에서 우리는 함께 숨 쉬며 함께 취하면서 살아가는 공동의 미학을 이루어갑시다.”라고 했다. 그리고 인터뷰를 마치고 온 다음 날 주요 일간지는 다음과 같은 기사들을 다투어 쏟아냈다.

“고은 시인이 이탈리아 로마재단에서 수여하는 2017년 ‘국제시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 고은 시인은 아담 자가예프스키(폴란드), 하코보 코르티네스(스페인), 캐럴 앤 더피(영국)를 이은 네 번째 수상자다. 2월 3일 열리는 시상식에는 이탈리아 문화부 장관과 로마재단 이사장이 공동 시상자로 나서며, 고은 시인은 수상 기념 연설을 하고 시 낭송을 한다. 시축제는 로마의 아드리아노 신전과 피에트라 광장에서 2월 1일부터 4일까지 개최된다.”문화+서울

글 김형수
시인. 고은 대담집 <두 세기의 달빛> 저자. 신동엽문학관 상임이사
사진 김창제
자료 사진 제공 고은재단
www.kounfoundati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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