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서울문화재단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검색 창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COLUMN

12월호

만화가·일러스트레이터 이윤희의 연남동 정착기숲길 바깥 쪽으로, 한 뼘 더
연남동은 서울의 걷기 좋은 동네 중 한 곳이다. 최근 경의선 숲길이 조성되면서 ‘연트럴파크’라 불리는 곳 일대는 산책과 데이트를 즐기는 이들로 북적거린다. 홍대 앞을 자주 오가다 연남동에 정착하게 된 이윤희 작가도 동네 산책을 즐긴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는 ‘연희동 남쪽 지역’의 풍경은 조금 다르다.

서울 토박이의, ‘어쩌다 마주친’ 연남동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하지만 서울이 내 고향이라고 하기엔 별 특색이 없는 흔하고 평범한 동네에서 살았다. 내가 어릴 때부터 생각하는 서울의 이미지는 집에서 한 시간이나 버스를 타고 가야 했던 명동이나 광화문, 종로의 모습이었다. 그런 중심지에 가야 정말 서울,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20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홍대 앞에 가는 일이 잦았다. 홍대입구역 역시 같은 서울 안이어도 집에서는 1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였다. 딱히 잘 아는 곳도 없었지만 작가 생활을 시작하면서 거기서 모이는 일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하도 가다 보니 내가 살던 동네보다 홍대입구역 출구로 나오면 마음이 탁 놓일 정도였다. 그러다 홍대 일대의 좋아하던 가게, 좋아하던 풍경이 점차 사라지고 프랜차이즈 상점이 들어서 그 풍경이 많이 바뀌게 된 건 불과 몇 년 만에 일어난 변화였다. 홍대 앞에 대한 예전만큼의 감흥이 떨어질 때쯤, 좋은 기회가 되어 연남동에 작업실을 구해 살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연남동이 어딘지도 몰랐다.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홍대 앞에서 조금 떨어져 나와 주택가에 들어서면 한적하고 지극히 평범한 동네가 나오는데 그게 연남동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주택가 사이 곳곳에 회사, 출판사, 공방, 작업실들과 작고 아기자기한 카페, 레스토랑이 자리 잡고 있어서 결코 평범하지 않은, 호기심이 마구 생기는 골목이 많은 그런 곳이었다.

평범한 이들의 생계가 열심히 돌아가는 풍경

그렇게 연남동이 내 인생의 두 번째 거주지가 되었다. 요즘은 카페나 맛집이 많아서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는 곳이지만 나에게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들이 있는 곳이 연남동이다. 내가 사는 3층짜리 작은 건물을 보자면, 2층에는 나와 동료가 살았고 바로 아래층은 중국집, 위층은 가건물 옥탑이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듯 보였다. 1층 중국집은 수타로 면을 뽑는 집이었는데 아침 7시가 되면 밀가루 반죽을 쿵쿵 내려치는 소리가 모닝콜이 되어 날 깨웠다. 그리고 바로 앞과 옆 건물은 간판을 만들고 수리하는 집, 배달 전문 음식점이어서 오전 오후 내내 용접하는 소음과 오토바이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또 창문을 열면 건너편 위층에서는 옷을 만드는 공장인 건지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가 밤까지 이어질 때도 있었다. 그렇게 바쁘고 활력 넘치는 일터와 삶의 현장 틈에서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아이러니한 기분과 동시에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 주로 단행본에 들어가는 일러스트 작업을 했는데 같이 일하는 출판사가 연남동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편했던 것 같다. 한번은 계약한 출판사가 바로 집 앞으로 이사를 온 적이 있다. 처음에는 반가운 마음이 들었으나 작업이 잘 풀리지 않고 마감이 늦춰질수록 뭔지 모를 압박감이 몰려왔다. 샤워를 할 때 화장실 창문 바로 너머에 있는 출판사를 바라보면 우울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완성 후 원화를 5초 만에 건네러 갈 수 있다는 건 참 좋았지만 말이다.

서울 단상 관련 이미지

좋아하는 풍경 속에 스며 살아보는 일의 즐거움

마감이 끝나면 무조건 나가서 동네를 걸어 다녔다. 처음에 살 때에는 이렇게 생소하고 복잡한 골목들을 잘 찾아다닐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익숙해지고 나서는 내가 즐겨 걷는 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중 좋아하는 산책 코스는 한적한 주택가를 빠져나와 예쁜 카페들과 인기가 많은 식당, 맛있는 중국요릿집들 사이를 지나 터널을 통과해 연희동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연남동은 연희동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고 있다. 연남동이라고 분류된 구역은 듬성듬성 넓게 분포되어 있어서 같은 연남동이라도 내 작업실에서부터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까지 가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그 코스를 따라 걸으면서 마주하게 된 것도 많다. 길고양이들이 모이는 카페 앞 화단은 일부러 꼭 지나갔고 오랫동안 비어 있어 풀과 나무가 제멋대로 자라 숲을 이루고 있는 공터를 스윽 들여다보기도 했다. 또 언젠가부터 유명해진 파스타집의 길게 늘어선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바닥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계신 할아버지와 마주치기도 했다. 나에게 점차 익숙해져가는 이런 풍경들은 어느새 늘 마주하게 되는 일상이 되어 없어지면 불안하고 걱정될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렇게 소중해진 일상은 자연스럽게 내가 구상하고 있는 만화 시나리오의 배경이 되었다. 한 권짜리 만화 작업을 시작할 무렵 연남동에는 본격적으로 공원을 만드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작업이 잘 안 될 때 공사 현장 근처를 산책하면서 ‘공원이 만들어지기 전에 내가 먼저 만화를 끝내야지.’ 혼자 다짐하기도 했다. 공원과의 경쟁에서는 결국 내가 졌다. 공원은 순식간에 생겨나더니 정말 많은 사람이 몰렸다.
요즘은 특히 주말에 사람이 많아서 가게마다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혹시 연남동도 홍대 앞처럼 변하는 게 아닐까 걱정되기도 한다. 한때 이곳의 방문자였던 내가 거주자가 되어 살아보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겉으로만 보던 장소에 정착하고 그곳을 알아가며 익숙해져가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다.문화+서울

글·그림 이윤희
만화가, 일러스트레이터. 다수의 단행본과 잡지에 그림과 단편 만화를 실었다. 연남동을 배경으로 한 장편 <안경을 쓴 가을>을 지었다.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