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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1월호

청량리동 ‘coffee time’에서 보낸 시간꿈을 간직한 이들의 호우시절
매일 비슷한 패턴으로 반복해 보낸 시간은 그리 깊이 남지 않는 듯하다. 아침에 습관적으로 마신 커피, 가벼운 농담을 나눈 동료나 친구, 고단함을 안고 탄 귀갓길 ○○○번 버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한때 보낸 일상이 소중하고 그립게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요즘 최지훈 사진가에게는 청량리동에서 보낸 때가 그렇다.

서울 단상 관련 이미지

나는 지금 외국에서 지내고 있다. 작은 수로와 골목들로 이뤄진 이 도시에 머물면서 이곳으로 여행 온 이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일을 한다. 낯선 타국에서의 삶은 기대만큼 신나지도 생각만큼 고되지도 않다. 이색적이기만 하던 풍경이 제법 익숙해진 후로는 새벽 늦게 잠들어 때가 되면 밥을 챙기고 일정에 맞춰 사람들을 만나고 남는 시간에 무얼 하며 무료함을 달랠지 궁리하는, 서울에서 보낸 나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시간으로 채워진다. 시간이 빌 때는 주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골목을 찾아 들어가보는데, 운이 좋으면 싸고 분위기 좋은 카페나 바를 찾아내기도 한다. 바에서 커피를 내리고 말을 건네는 낯선 얼굴의 익숙한 몸짓을 지켜보고 있으면 어슴푸레 떠오르는 어떤 동네의 풍경, 그리고 사람들이 있다.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분명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대학 시절 내가 일했던 그 카페는 인적이 드문 길에 있었다. 버스가 다니는 대로변인데도 걸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대신 그 거리엔 나무가 많았다. 모든 계절이 다 아름다웠지만 특히 가을이 되면 세상이 온통 노란 빛으로 물들었고, 잘 닦인 가로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휴일에만 문을 여는 작은 수목원도 만날 수 있었다. 서울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조용하고 고즈넉한 풍경을 가진 동네였다. 고려대와 경희대 사이에 위치한 이 동네가 행정구역상 청량리동이라는 사실을 안 건 한참 뒤의 일이다. ‘coffee time’은 청량리동 산책로의 길목에 있었고, 근처를 지나다 우연히 들른 것을 계기로 나는 휴학과 동시에 이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지금은 다소 시들해졌으나 그때는 카페라는 공간이 주는 문화적인 냄새에 한창 취해 있던 시기였다. 귀여웠던 허세가 일상의 노고로 변해버리는 건 순식간이었는데 하루에 아홉 시간씩 주 6일을 내내 서서 일하는 건 생각 이상으로 고된 노동이었다. 지난한 시간을 견디게 해준 건 유리창 너머의 변함없이 평화로운 거리와 함께 일하던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coffee time에는 저마다의 꿈을 간직한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카페를 준비하던 두 아이의 아빠, 요리가 취미인 사법고시생, 서울대 출신의 영화학도, 일본에서 온 유학생까지. 서로 다른 이야기와 가치관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함께 일하고 음식과 이야기를 나누며 같은 공간과 계절을 사이좋게 향유했다. 사람을 대하는 일이 점점 어렵게만 느껴지는 지금에 와서야 깨닫는다. 그때가 그저 ‘운이 좋았다’ 라고밖에 할 수 없는 호우시절이었음을. 아직도 또렷하다. 주스용 과일을 사러 청량리 시장까지 걸어갔던 길, 돌아오는 길에 곧잘 들르던 시장 냉면집, 식사시간에 잠시 짬을 내어 산책하던 홍릉수목원과 미로 같기만 하던 부흥주택지구, 주방에 삼삼오오 모여 만들어 먹던 하루키 샌드위치와 비빔밥, 짧은 일본어와 영어를 총동원해 나쓰코 누나에게 설명해야 했던 어려운 한국말, 함박눈이 오던 퇴근길에 막차를 놓치고 언 손을 호호 불며 걷던 회기로, 청춘이 고달퍼 울부짖으며 뜀박질로 건너가던 종암대교 위의 함박웃음까지. 우리는 고된 하루를 버티기 위해, 불안한 미래를 감추기 위해 열심히 동네를 활보했고 어느 사이엔가 자연스럽게 그 동네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우리의 추억이 자본에 더는 잠식당하지 않길

나는 이 도시로 오기 전에 잡지 <브로드컬리>의 사진작가로 참여했다. <브로드컬리>는 ‘좋은 가게는 오래가면 좋겠다’를 모토로 현재 고군분투하고 있는 로컬숍들의 솔직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계간 연구지다. 높은 원가와 임차료, 프랜차이즈의 물량 공세, 소비자의 무관심 등의 악조건 속에서도 힘겹게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지켜나가는 분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을 때마다 이 가게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도록 잘 버텨주기를 바라게 되었다.
이제 coffee time은 그곳에 없다. 단골이 꽤 많은 가게였지만 주변에 우후죽순으로 카페가 생겨나면서 벌써 몇 년 전에 오리백숙집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그때 함께 일했던 사람들도 흘러가버린 시간의 틈 사이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물론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고, 어쩌면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로 남겨두는 게 자연스러울 테지만 역시나 아쉬운 마음을 숨기기 어렵다. 내 욕심이 지나친 것일지 모르나 자본의 논리에 따라 추억의 지분까지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심히 안타까울 뿐이다.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분명해지는 기억들이 있다. 그때 그곳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는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심드렁하게 지나치고 마는 지금의 자리는 나중에 이곳을 떠난 후에야 분명해질 것이다. 현재를 소중히 여기고 잘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뻔한 말이나 지키기 참 어려운 오늘의 작은 바람이다.문화+서울

글 최지훈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하고 지금은 프리랜서 사진가로 일하고 있다. 잡지 <브로드컬리>에 참여했다.
그림 M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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