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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호

<변칙 판타지> 무대에 올리는 미디어 아티스트 정은영 잊힌 판타지가 진짜 무대를 만났을 때
미디어 아티스트 정은영은 여성의 삶에 지속적으로 천착해온 작가다. 그의 작업 방식이 적극적으로 바뀌고 독특한 에너지를 띠게 된 것은 <여성국극 프로젝트>부터. 한국에서는 거의 잊힌, 여성 배우가 남성의 역할까지 하는 ‘여성국극’ 무대에서, 화려한 분장을 한 배우가 이상적인 남성상을 연기할 때의 그 독특한 판타지는 “정상도 반칙도 아닌 ‘변칙’”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영상, 설치, 사진 등 다양한 매체로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이어온 정은영 작가가 오는 10월에는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한 작품 <변칙 판타지>를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올린다. ‘무대를 거의 잃어버린 이들이 진짜 무대에 서게 되면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기다리는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

일본의 다카라즈카, 그리고 한국의 ‘여성국극’

일본 문화예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미혼 여성으로만 이뤄진 다카라즈카 가극단, 일명 ‘다카라즈카’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일본 전통 예능인 가부키에서 남성이 여성 역할을 맡는 것과 반대로 다카라즈카에선 여성이 남성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특징이다.
1914년 일본 대기업 한큐전철이 온천의 여흥거리로 시작한 다카라즈카는 현재 연간 공연 횟수 1,300회, 관객 250만명을 웃돌 만큼 인기 있는 장르다. 대개 1부에선 뮤지컬을 공연하고 2부에서는 레뷰(쇼)를 선보인다. 배우 양성을 위해 1919년부터 2년제의 음악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매년 80명 정원의 입학 경쟁률이 20~30대 1에 이른다. 다카라즈카 스타가 될 경우 높은 인기를 누릴 수 있는 데다 가극단을 퇴단한 뒤 여배우로서 연예계나 공연계에서 다시 활동할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사랑 지상주의 줄거리를 비롯해 만화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 무대와 의상, 분장 등 다카라즈카는 언뜻 보면 유치하다. 하지만 고도로 양식화한 독자적 장르로 자리매김하며 102년째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남성상을 연기하는 남자역 배우들은 세대를 거듭하며 여성팬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일본에 다카라즈카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여성국극이 있다. 다만 다카라즈카가 지금도 일반 대중의 각광을 받는 것과 달리 여성국극은 거의 소멸 단계라는 점에서 극명한 차이가 있다. 여성국극은 1948년 명창 박록주(1906~1979)를 중심으로 여성국악동호회가 무대에 올린 <옥중화>에서 시작된다. 처음부터 서양음악을 바탕으로 한 다카라즈카와 달리 여성국극은 전통적인 판소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춘향전>을 각색한 <옥중화>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듬해 <햇님 달님>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여성국극의 인기가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됐다. 당시 창극이 ‘국극’으로 불렸기 때문에 여성창극 대신 여성국극이란 이름이 일반화됐다. 새로운 장르인 여성국극의 성공에 따라 단체들이 앞다퉈 만들어졌고, 이들의 공연은 관객으로 가득찼다. 특히 임춘앵(1924~1975), 조금앵(1930~2012) 등 남자 역 배우들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950년대 최전성기를 구가한 여성국극은 1960년대 들어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TV 등장 등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데다 후진 양성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다만 과거에는 여성국극에 대해 정통성 있는 판소리 또는 혼성 창극보다 조악한 음악극이라고 비하하는 것은 물론 그 쇠퇴 원인이 여성들 간의 고질적인 알력 다툼이라는 편견이 존재했지만 최근엔 여성 집단에 대한 사회적 무시와 차별을 지적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국극은 간신히 명맥만 이어오다 1990년대 초반 원로배우들을 중심으로 부활에 나섰지만 쇠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싱글채널 비디오 작품인 <노래는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에는 여성국극의 황금기에 남역 악역(가다키)을 맡아 유명했던 배우 이소자의 이야기가 담겼다.

여성의 현실과 판타지의 극단을 한데 안은 배우들,
그리고 이들을 담은 작품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광복 후 늘어난 여성 명창들이 국악계의 가부장적 폭력성에 맞서 만든 게 여성국극이었어요.”

여성주의 미디어 아티스트 정은영은 2008년부터 한국에서 잊혀가는 여성국극을 통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성적 역할에 의문을 제기하는 <여성국극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리서치 기반 작업인 <여성국극 프로젝트>는 여성국극에 대한 조사와 연구, 전?현직 여성국극 배우들과의 지속적인 접촉 및 인터뷰, 워크숍 등으로 이뤄진 작업이다. 그는 그동안 영상, 사진, 설치, 공연 등 다양한 접근 방식으로 관객과 만나왔다. 오는 10월 5~9일에는 남산예술센터에서 그가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하는 <변칙 판타지>를 선보일 예정이다.
“여성국극은 반칙은 아니지만 정상도 아닌 ‘변칙’이라고 생각해요. 전에 없던 새로운 장르가 아니라 기존 창극의 변칙인 셈이죠. 1945년 광복 후 일본이 기생을 관리하려고 만들었던 권번이 폐지됐는데요. 소리와 춤을 익힌 기생들이 자연스럽게 국악계로 편입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늘어난 여성 명창들이 국악계의 가부장적 폭력성에 맞서 만든 게 여성국극이었어요.”
그가 한국 공연예술 역사에서 잠깐 빛났다가 현재 명맥을 잇기도 힘든 여성국극을 소재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데는 2007년부터 2년간 참여한 <동두천 프로젝트>의 도움이 컸다. 그는 고승욱, 김상돈, 노재운 등 3명의 작가와 함께 2년간 동두천에서 기지촌 여성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질문하는 작업을 했다. 2000년대 초반 그의 작업이 주로 개인의 경험을 사회적 영역으로 확장하는 소극장 방식이었다면 <동두천 프로젝트>를 통해 작가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해석하는 것을 학습할 수 있었다는 평가가 많다.
“<동두천 프로젝트>는 의미 있었지만 작업이 끝난 뒤 저는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었어요. 그때 대학 선배인 여성학자 김지혜 교수로부터 여성국극 연구 모임에 나오라는 권유를 받았습니다. 아티스트인 제가 여성국극을 소재로 예술 작업을 하면 좋을 것 같다고요. 고등학교 시절 TV에서 다카라즈카를 재밌게 본 기억도 나고 해서, 선배를 따라 원로 여성국극 배우들의 정기모임에 나갔는데요. 이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독특한 아우라나 이야기가 그렇게 흥미로울 수가 없더라고요. 매혹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후 그는 정기모임에 꾸준히 참석했다. 몇 달이 지나자 원로 배우들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9년 처음으로 자신의 작업에 여성국극 배우를 등장시킨 영상물 <분장의 시간>을 발표했다. <분장의 시간>은 원로배우가 분장을 통해 남자로 변신하는 모습을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찍은 것이다. 이어 발표한 <뜻밖의 응답>(2009)과 <리허설>(2010) 역시 무대만 오르면 카리스마 넘치는 남성 캐릭터로 변하는 원로배우들의 모습을 통해 성별에 부여된 고유한 규범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편 현실과의 모순된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냈다.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

“여성국극에 대해 공부하면서 2011년 정말 깜짝 놀랄만한 사진을 보게 됐어요. 연구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지만 남자 역으로 유명했던 배우 조금앵과 그의 팬의 가상 결혼식 사진이었어요. 사실 조금앵은 세 번의 결혼을 통해 아이를 낳았거든요. 그런데도 그녀의 앨범에는 실제 결혼사진이 아니라 이 사진만이 남아 있어요. 여성국극의 변칙술, 새롭고 이상한 남성 젠더의 탄생, 배우에 대한 팬들의 정념 등에 대해 좀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판타지를 좇는 이들의 불안하고 어렵고 아름다운 삶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여성국극은 반칙은 아니지만 정상도 아닌 ‘변칙’이라고 생각해요.
새로운 장르가 아니라 기존 창극의 변칙인 셈이죠.”


작품 <정동의 막>은 여성국극에 매료돼 뛰어든 배우 남은진의 모습과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남은진의 이야기는 신작 <변칙 판타지>의 뼈대이기도 하다.

주로 사진과 영상 등의 아카이브 작업을 해온 그는 이후 카메라 앞에서 부자연스러운 원로배우들의 모습을 보며 공연을 만드는 것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2012년작 <(off)stage>는 1세대 배우가 등장해 렉처 퍼포먼스를 하는 형식이고, 이듬해 페스티벌 봄에서 <(off)stage>와 함께 선보인 <Masterclass>는 2세대 배우가 자신의 제자에게 남성의 역할을 가르치는 순간을 그대로 보여주는 무대다. 무대 이면의 실상을 작품의 소재로 활용해 깊이 있는 메시지를 준다는 점에서 안무가 제롬 벨(J r me Bel)을 연상케 한다. 이 프로젝트로 그는 2013년 국내에서 최고 권위를 지닌 미술상인 에르메스 상을 받은 바 있다.
또 당시 리허설을 보러 왔던 도쿄아트마켓(TPAM) 측의 제안으로 두 작품을 일본에서 선보이기도 했다. 2013년 <정동의 막> 비디오?공연은 여성국극의 후계자인 젊은 배우 남은진에 초점을 맞춘 작품으로 그의 프로젝트를 다시 한 번 확장시켰다. 카메라에서 무대로 작업 방식이 바뀔수록 외부 관찰자였던 그는 점점 더 깊이 개입하게 됐다.
“남은진은 우연히 본 여성국극에 이끌려 이등우 선생님의 제자가 됐어요. 하지만 여성국극이 쇠락해가는 요즘 좋은 배우가 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이 친구는 고민 끝에 선생님을 떠났어요. 한때 자신을 매혹시켜 뛰어들었지만 이렇게 자신의 삶이 불안정해질지는 몰랐던 거죠. 사실 우리 모두가 허망한 판타지를 안고 사는 거지만요. 그런데 이 친구가 마침 페스티벌 봄에서 선보인 제 작품을 봤고, 이런 방식의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정동의 막>이 나왔어요. 그리고 올해 <변칙 판타지> 역시 남은진의 이야기가 공연의 뼈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변칙 판타지>는 여성국극에 매료된 남은진이 배우가 되려는 과정을 통해 무대의 판타지를 다룬다. 여성국극의 부흥을 경험하지 못한 남은진에게 여성국극은 원로 선생님들의 무용담 같은 회고를 바탕으로 그 자신이 상상한 판타지로서 존재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것은 곧 정통성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의 경우 1980년대 촌스러운 분위기를 배경으로 남은진 외에 남성 아마추어 합창단인 지보이스(G-Voice)가 출연할 예정이다. 지보이스를 다룬 다큐멘터리 <위켄즈>는 지난 2월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대한민국 최초 관객상을 수상한 데 이어 오는 10월엔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부문에 공식 초청돼 국내에서 첫 공개된다.
“무대는 1980년대 게이스러운 분위기가 날 것 같아요. 전체적으로 촌스러워도 개인들의 활기가 느껴질 거예요. 다들 아마추어라는 게 조금 걱정되지만 내면의 에너지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어요.”문화+서울

사람과 사람 관련 이미지<SeMA 비엔날레미디어시티 서울 2014>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사랑이 넘치는 신세계> (©서울시립미술관).

글 장지영
국민일보 기자, 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김창제, 서울문화재단, 서울시립미술관
작품 사진 <노래는 부르지 않을 것입니다>(2015), <정동의 막>(2013) 영상 갈무리(정은영 작가 홈페이지 www.sirenj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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