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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7월호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 한국 건축의 ‘용적률 게임’ 용적률, 제약을 넘어 깊이의 마법을 찾다
‘좁은 면적에 비해 사람이 많다’는 한국 도시의 특징과 ‘집=파는 것’이라고 하는 데 자리한 특유의 욕망은 한국의 건축주-건축가의 ‘용적률’에 대한 강박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에서 한국관은 ‘용적률: 창의성을 촉발하는 제약’을 주제로 서울의 변화 양상과 사람들의 욕망을 다뤘다. 용적률이라는 제약은 어떻게 ‘깊이’를 담은 건축으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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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건축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김중업의 ‘살아 있는 선’? 김수근의 ‘궁극의 공간’? 아니면 승효상의 ‘비움’?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은 거창한 단어가 아니라 숫자에서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바로 ‘용적률’*이다. 용적률은 대지 내 건축물의 바닥 면적을 모두 합친 면적(연면적)의, 대지 면적에 대한 백분율을 의미하는 법적 용어다. 그런데 왜 하필 용적률일까? 올해 한국관 주제는 ‘용적률 게임: 창의성을 촉발하는 제약(The FAR Game: Constrains Sparking Creativity)’이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건축전 전체 주제인 ‘전선(前線)에서 알리다(Reporting from the Front)’에 맞춰, 대한민국 건축가의 최전선으로 용적률을 꼽은 것이다. 총괄 예술감독인 김성홍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는 한 간담회에서 “한국 건축가는 땅을 보면 먼저 최대로 지을 수 있는 건물 면적을 생각한다”면서 “용적률은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는 렌즈로, 2010년 이후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용적률의 강박과 창조의 요구 사이에 선 건축가

김성홍 교수의 말처럼 좁은 대한민국 땅덩어리에 지어지는 모든 건물은 태생적으로 용적률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죄다 짜낼 것을 요구받는다. 특히 오랫동안 집은 ‘사는 곳’이 아니라 ‘파는 것’이라는 생각이 만연한 이곳에서, 모든 건물은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수익을 뽑아낼 것을 강요받는다. 심지어 건축가들은 법이 허용하는 용적률보다 더 많이 짓는 ‘마술’을 요구받기도 한다. 용적률뿐 아니라 일조사선, 도로사선이 마구잡이로 대지 위를 가로지르는 상황에서 건축가들은 건물은 자신이 아니라 건축 법규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자조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용적률을 꽉꽉 채운 건물에서 건축가에게 남겨진 것은 ‘껍데기’뿐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은 용적률을 ‘창의성을 촉발하는 제약’이라고 한다. 건축주의 욕망과 공적인 법규가 극단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에서, 건축가는 불가능한 창조에 몰두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용적률을 모두 채우고 남겨진 그 얇디얇은 껍데기에 ‘깊이’를 부여하려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철학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지각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Perception)>에서 깊이를 가장 실존적인 차원이라 일컬었다.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깊이는 나와 물체, 나와 세상이 엮이는 근원적인 차원으로, 거리와 높이의 차원이 파생되어 나오는 첫 번째 차원이다. 또한 건축이론가 알베르토 페레즈-고메즈(Alberto Perez-Gomez)는 (1997/2000)에 서 르코르뷔제(Le Corbusier, 1887~1965)의 걸작 라투레트 수도원(Couvent Sainte-Marie de La Tourette, 1959)을 예로들며, “건물에서의 깊이는, 미학적 물체나 기하학적 투영이나 사진들로 환원될 수 있는 건물의 ‘3차원’과는 구분되는, 시간 속의 원초적인 차원으로 다시 등장한다” 라고 했다. 깊이는 단지 물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건축가에게 깊이는 곧 근원에 다가가려는 욕구가 발현되는 건축적 창구인 것이다.

서울 건축 읽기 관련 이미지1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 전시된, 서울의 전경 사진.
2 건축가 김인철의 ‘도곡동 Persona’ (사진 오른쪽 아래 건물) ©박영채.

건축적 깊이는 어떻게 구현되는가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건축가는 어떻게 깊이를 확보하려 하는가? 건축가는 남아 있는 껍데기에서 어떻게든 깊이를 찾기 위해 매달리거나, 껍데기를 모두 벗어던지고 ‘덩어리’에서 깊이를 찾아야만 한다. 건축가 김찬중의 ‘한남동 104 프로젝트’가 전자의 경우라면, 건축가 김인철의 ‘도곡동 Persona’는 후자라고 할 수 있다. 언뜻 보면 가우디의 카사 밀라(Casa Mila)를 연상시키는 한남동 건물의 꿀렁꿀렁한 입면은,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잠시라도 머리를 식힐 수 있는 소중한 야외 공간의 역할을 하는데, 독자적인 논리를 가진 듯한 외피는 내부 공간과 대로 사이를 가볍게 부유하며 사용자들에게 자신만의 깊이를 찾을 기회를 제공한다. 내부 공간에 종속되지 않은 외피는 더 이상 입면으로 불리기를 거부한다. 건물의 껍데기는 더 이상 누군가의 껍데기이기를 거부하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반면 건축가 김인철의 ‘도곡동 Persona’에서는 상대적으로 엄청난 무게감이 느껴진다. 기괴한 형태의 노출콘크리트 건물은, 마치 오래전 땅속에서 솟아오른 거대한 바윗덩어리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그 덩어리는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의 ‘보이지 않는 손’처럼 건폐율과 용적률, 일조사선과 도로사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극단적으로 건축주의 욕망과 법규에 충실한 건물은 역설적으로 엄청난 깊이의 알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다가온다. 마치 거대한 자연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말이다.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은, 널찍한 공간에 캐노피를 맘껏 날리며 원 없이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는, 거창한 공공건축이나 문화예술 공간이 아닌, 자본주의의 극단에서 불가능에 가까운 깊이를 구현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근생과 오피스에서 진정한 시대정신(Zeitgeist)를 찾고 있다. 더는 ‘깊이’를 논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에게 새로운 ‘깊이’를 찾아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그들이 진정한 건축가다.문화+서울


*용적률=(건축물 연면적/대지 면적)×100

글 조한
현재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교수이며 한디자인(HAHN Design) 대표로 건축·철학·영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간·공간’에 관한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서울, 공간의 기억 기억의 공간: 건축가 조한의 서울탐구> (돌베개, 2013)가 있다.
사진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건축사사무소 아르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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