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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9월호

주민의 삶이 완성한 집, 청량리 부흥주택 단지 삶의 행태가 집의 형태를 바꾸다
건물은 필요에 의해 건축주와 여러 건축 종사자에 의해 지어진다. 처음 지어진 건물은 그저 투박하고 건조한 콘크리트 상자인 듯 느껴지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행태와 건물 관리의 노력 등이 시간을 따라 덧칠해지면서, 그곳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생기를 드러내게 된다. 결국 나 같은 건축 종사자들이 아무리 아등바등 건축을 완성하려 해도, 실제로 건축은 온전히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의 몫이 되어 그만의 색깔을 드러내게 된다. 즉 그곳에 거주하거나 사용하는 사람들의 삶의 행태와 시간이 건축을 빚어내는 것이다.

건물사진

이처럼 새롭지 않은 평범한 진실을 다시 한 번 느낀 곳은 몇 달 전 들른 ‘청량리 부흥주택 단지’였다. 오래전부터 2층집이 일자로 쭉 연결되어 주거단지를 형성한 이곳의 골목 골목은 사람 사는 냄새를 물씬 풍길 정도의 정겨움이 있고, 더욱이 내가 살던 고향의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일자로 쭉 뻗은 골목임에도 어떤 길은 골목 양옆으로 화초가 가득해서 마치 남의 집 정원에 들어온 듯 멈칫하게 된다. 곳곳에 가득한 고추, 상추 등의 채소 화분이 늘어서 있고 대문 위, 담장 위에도 이름 모를 화초로 가득해 입체적으로 그 공간을 감싸고 있으니 마치 정원처럼 착각하게 된다. 그곳을 가꾸는 사람들도 보인다. 길가에 웅크리고 앉아 채소를 다듬는 아주머니, 평상에서 혼잣말을 두런거리시는 할머니…. 열린 문틈으로 집 안에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가 새나온다. 문득 ‘예전에는 이곳 또한 한낮에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시끌벅적했겠지’ 싶다. 고개를 높이 드니, 하늘과 맞닿은 처마 밑 빨랫줄에는 색색의 빨래며 이불이 햇빛을 쬐고 있다. 햇빛에 잘 말린 보송보송한 이불에 감싸였을 때 느낀 평온함. 이곳이 낯설지 않다. 어쩌면 아주 평범한 골목길이지만, 내가 찾던 행복의 장소 중 한 곳처럼 느껴진다. 스위스 건축가 피터춤토르(Peter Zumthor)는 말하지 않았던가. “기억이야말로 가장 심오한 건축 경험”이라고.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해 ‘대량생산’된 초기 부흥주택

청량리 부흥주택 단지의 내력은 이렇다. 1950년대 초반, 6·25전쟁이 끝난 직후 황폐화된 서울에는 북에서 온 실향민과 도시로 몰려드는 농어민 등으로 인해 주택 수요가 폭증하고 있었다. 서울시와 정부는 이러한 주거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차관이나 국채를 통한 부흥자금으로 주택재건사업에 힘을 쏟게 된다(그래서 이른바 ‘부흥주택’이라고 불리게 됐다). 그 당시 청량리역은 중앙선과 경춘선의 시발역으로 많은 사람이 빈번히 오가는 곳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공원과 풍치지구로 지정돼 빈 터로 남아 있던 홍릉 주변 청량리동은 여러 조건이 맞는 곳이라 이곳에 부흥주택 단지를 건설하게 된다. 1955년 204호의 시영주택을 짓고, 1957년에는 283호의 영단주택을 공급하게 된다. 즉 이곳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주거 군락과 다른, 정부 주도하의 공공개발 집합주거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건축계획의 측면에서는 지금의 아파트와 같은 단지식 공동주택의 과도기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거주지이기도 하다.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흙벽돌(석회벽돌) 또는 석근 블록(돌로 속을 채운 시멘트블록 일종)을 사용해 일자형의 15~17평 규모의 2층짜리 한 가구를 연결해 4가구가 한 주거동으로 계획돼 지어졌다. 내부에는 화장실과 2층 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었고, 1층은 온돌, 2층은 마루였다고 한다. 그리고 체계적인 계획하에 조성되었기에 단지는 격자 형태로 질서정연하게 배치됐으며, 길게 연결된 각각의 주거동 사이사이에 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 너비의 골목이 형성되었다.

1, 2 청량리 부흥주택 골목의 모습. 주민들은 이곳에 살며 담장을 짓고 화초를 키워 그들의 삶을 자연스레 드러내고 있다.1, 2 청량리 부흥주택 골목의 모습. 주민들은 이곳에 살며 담장을 짓고 화초를 키워 그들의 삶을 자연스레 드러내고 있다.

삶의 다양한 변화를 자연스레 드러내는 2015년 부흥주택

놀라운 사실은 50여 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지어질 당시 주거 형식의 원형이 대부분 보존된 상태에서 그간 거주한 주민들에 의해서 놀랄 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이곳을 몇 차례 들러볼 때만 해도 벽돌, 타일, 시멘트 등으로 쌓은 다양한 담장이나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나 지붕 처마 등이 자연스럽게 보였기에 조성 당시부터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자료*를 찾으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관련 연구 논문이나 옛 사진에 기록된 부흥주택 단지는 1980년대 한강 이남의 대표적 주거 풍경이던 획일화된 아파트 단지 모습과 배치 및 형태 면에서 유사한 모습을 띠고 있었다. 획일적인 외관에 담장은 보이지 않고, 지붕 또한 같은 기와가 덮여 모든 주거동이 다 똑같아 보였다.
그러나 지어진 이후, 이곳의 주민과 세월이 만든 변화상을 정리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마을의 주 진입도로에는 이제 은행나무가 제법 자라 가로수길 모습을 갖추었고, 더불어 가로수길 주변의 주택들은 상가+주택 등으로 증축되면서 마을의 편의 및 커뮤니티 성격의 근린생활공간으로 변모해왔다. 자식들이 태어나면서 부족한 방을 해결하기 위해 집 앞뒤로 한 칸씩 증축을 하며 밀도가 더욱 높아졌고, 당시 화장실은 멀수록 좋다는 거주 의식이 실내에 있던 화장실을 대문 초입 옆으로 내몰았으며, 이후에 많은 가구가 월세수입을 목적으로 2층 거주공간을 세놓으면서 내부 계단을 없애고 외부 계단을 두어 출입을 분리했다. 그러다보니 2층 앞에 진입 복도 공간이 형성되어이후에는 자연스레 그곳이 또 다른 다목적 생활공간으로 쓰이면서 깊은 처마를 덧대며 개조되어 지금의 모습이 된 듯하다. 또한 세월이 흐르면서 비 새던 지붕을 집집마다 각기 다른 재료, 다른 색깔로 고치다보니 지붕에 다채로운 변화가 생겼고, 담장과 대문 역시 새로 만들다보니 삶의 다채로움만큼이나 다양한 모양, 재료, 색깔의 담장과 지붕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아름다운 건축은 사람이 머물고 만드는 건축

도시를 만드는 ‘건축의 집단성’이란 곧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도시의 다양한 형태의 창조자로서 작용하게 하고, ‘삶이 곧 형태’를 만드는 삶의 정신이 존재한다고 했던가.** 새삼 이곳의 변화된 모습을 관찰하고 조사하면서 ‘시간과 삶의 다양성이 집을 만들고 도시를 만든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든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집조차 자본 축적 상품으로 둔갑해 수익성에 맞춰 거주공간의 질이 결정되고, 이 도시의 장밋빛 미래라고 홍보하며 저마다의 이면에 숨은 탐욕을 추구하는 정치인이나 건설사, 시행사 등의 개발 주체와 언제나 행복한 건축을 설계했다고 포장하는 건축설계집단에 의해 이곳의 집과 도시가 만들어지고 있지 않은가.’ 한편 그 또한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이 역시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는 방식이며, 그에 상응하는 집과 도시로 변모한 것이 현재의 서울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다른 희망과 긍정을 본다. 서울 곳곳 삶의 흔적이 녹아있는 곳들을 찾는 젊은이들에게서, 큰 아파트를 버리고 옛 가옥을 고쳐 이사한 후 작은 마당에서 바라본 하늘에 미소 짓던 어느 중년 남자에게서, 그리고 청량리 부흥주택 단지의 골목골목 곳곳을 자신의 앞마당처럼 가꾸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다른 희망과 긍정 그리고 변화를 본다. 이 또한 서울의 미래상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 머무는 곳을 행복의 건축, 아름다운 건축이라고 하고 싶다. 문화+서울

* 대표적인 학술 참고 자료는 <청량리 부흥주택의 특성 및 변화에 관한 연구, 정아선·최장순·최찬환> 등 이다.
** 도시유형학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건축가인 알도 로시의 <도시의 건축> 내용 중 참조.
글·사진 명재범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주)나무아키텍츠 건축사사무소(www.namuarchitects.com)를 공동 운영하고 있다. 삶의 형식으로서의 이 땅의 민가와 풍경에 관심을 가지고 틈틈이 기록·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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