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만의 결혼식 풍경
예전에는 사모관대 차림의 신랑이 신부 집에서 머리에 족두리를 얹은 신부와 초례상을 사이에 두고 절을 올리며 치르는 전통혼례 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화려 한 드레스를 입은 신부와 턱시도를 입은 신랑이 큰 식당을 빌려 치르는 서양식 결혼식이 시작됐습니다. 1930년대에는 서울 종로 에 전문 예식장이 등장했고, 1960년대에 들어서며 강당 같은 공 간에 의자를 놓고 마그네슘을 ‘펑’ 하고 터뜨려 사진을 찍는 예식 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때부터 형편껏 내던 부조도 현 금을 봉투에 담아 주는 방식으로 변모했습니다. 축의금을 내면 찹 쌀떡이나 케이크 등을 답례로 줬고, 이를 더 많이 받으려고 길게 줄을 서는 진풍경도 연출됐습니다. 1980년대에는 허례허식을 없 애기 위해 정부에서 호텔 결혼식을 금지하기도 했는데, 이 법은 1999년 폐지됐습니다. 1965년 한 신문에 “예식장이 기업화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 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이 기사에는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서울 시내에 순수 예식장은 한 곳도 없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자기 집 정원이나 교회, 클럽 등에서 간소하게 결혼식을 치른다”고 쓰여 있습니다. 당시 예식장 사용료는 3,000∼5,000원이었는데, 사진 촬영비와 장갑 비용을 따로 받아 총비용은 1만 원 정도였다고 합 니다.
1958년 기내 결혼식
우리 하늘에서 결혼했어요
<사진>은 1958년 7월 3일 국내에서 처음 열린 기내 결혼식 장면 입니다. 이날 결혼식은 국내 최초의 민간 항공사인 대한국민항공 사(KNA)의 서울∼부산 정기항공기 DC-4 기내에서 진행됐습니 다. 당시 대한뉴스 171호는 ‘공중 결혼식’이라는 제목으로 두 사람 의 결혼식을 전하며 신랑과 신부를 “우렁차게 들리는 프로펠러의폭음을 웨딩마치로 삼아 끝없이 푸른 창공을 동경하며 백년가약 을 맺은 한 쌍의 원앙”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또 다음날 신문에 이 결혼식 기사가 실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세계적 으로는 두 번째로, 공중에서 화촉을 밝힌다는 극적이면서도 드문 이야기”라는 문장으로 시작된 기사에는 “푸른 창공을 끝없는 행 복의 지표로 삼겠다는 이 ‘하늘의 부부’의 신랑은 현재 육군 공병 대 소속 중위다. 항공사 사장의 주례로 가족 3명과 낯선 손님(일 반 승객)을 모신 가운데 검소하게 백년가약을 맺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날 항공사 사장은 신랑, 신부를 위해 여의도비행장 까지 전용차를 제공했다고 합니다. 또 우연히 하객이 된 일반 승 객에게는 케이크를 선물했다고 합니다. 이날 결혼한 두 사람은 피 로연 등 비용이 많이 드는 허례에서 벗어나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기내 결혼식을 선택했다고 알려졌습니다. 요즘 수중 결혼식, 스카이다이빙 결혼식 등 이채로운 결혼식을 하 는 커플들이 간혹 있지만 당시에는 매우 파격적인 이벤트였습니 다. 기내의 모습이 지금과 많이 다릅니다. 창문에 천으로 된 커튼 이 설치돼 있고, 수하물 보관함에 덮개가 없습니다. 또 기내 통로 도 두 사람이 엇갈려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매우 좁습니다. 1949년 설립된 KNA는 운영난에 허덕이다가 1962년 정부로부 터 정기운송 사업 면허 취소 처분을 받았습니다. 단발기 3대로 국내선 운항을 시작한 이 회사는 6·25전쟁 때 부산에서 쌍발기 3대를 추가했고, 1953년에는 정부에서 100만 달러 융자를 받아 기내 결혼식이 열린 4발기 DC-4를 구입했다고 합니다. 한미항공 협정 체결 후 서울~시애틀, 서울~홍콩 등 국제선도 개척했지만 1958년 쌍발기 창랑호가 납북되면서 사운이 기울었고, 경쟁사 ‘에 어 코리아’와의 출혈 경쟁으로 운영난이 심화됐다고 합니다.
- 사진 김천길 전 AP통신 기자. 1950년부터 38년 동안 서울지국 사진기자로 일하며 격동기 한국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 글 김구철_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대중문화팀장으로 영화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