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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11월호

심심한 잉여들의 자가발전 페스티벌 우리 그냥 재미있는 것을 해보자
10월, 기분 좋은 바람과 햇살을 벗 삼아 나들이하기 좋은 달이다. 한 해 중 각종 페스티벌이 가장 많이 열리는 때이기도 한데, 대규모 페스티벌의 틈새로 ‘이불영화제’ ‘좀비워크 서울’ 등 잉여력 넘치는 소규모 축제들이 눈길을 모았다. 그저 재미있는 것을 해보자는 단순한 시도가 깨알 같은 재미로 도시의 흥을 돋운다.

과자전 행사장에 들어가기 위해 길게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과자전 행사장에 들어가기 위해 길게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

서울이 수상하다. 잔디밭에 모여 ‘멍 때리기’를 제일 잘하는 사람을 뽑아 트로피를 준다. 길거리에 이불을 깔아놓고 영화를 보고, 청계천에서 베개를 들고 싸움을 벌인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별다른 목적이 없다. 그저 잠깐 동안 만나 시간을 보내다 흩어지면 그만이다. 도대체 누가? 별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누군가 SNS에서 손을 들면 얼굴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제각각 준비하고 함께 놀고 흩어진다. 잉여들의 작은 축제, 소셜 페스티벌들이 도시 여기저기서 작은 재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자, 우리 그냥 재미있는 것을 해보자

“되는데요!” 지난 2012년 양천구 신원초등학교에 2000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사건의 발단은 어느 카메라 커뮤니티의 인터넷 게시판에서였다. 24인용 군용 텐트를 과연 혼자서 칠 수 있는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한 유저가 텐트와 장소만 마련해주면 실제로 해 보이겠다고 선언했다. 농담 반 진담 반의 이 제안은 삽시간에 SNS를 타고 퍼져나갔고, 텐트 치기를 핑계로 작은 축제가 벌어졌다. 가수 렉시가 자발적으로 축하 공연을 했고, 건빵, 정력팬티, 카메라 스트랩 등의 협찬품이 쏟아져 들어왔고, 인터넷 TV로 생중계되기도 했다.
‘T24 소셜 페스티벌’이라고 이름 지어진 이 행사의 의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내기는 핑계일 뿐 다 같이 놀고 싶었다.” 정말로 텐트를 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시껄렁한 내기를 보며 일요일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그 잉여의 순간을 즐기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만들어낸 여파는 그날로 끝나지 않았다. 친구들끼리 술자리에서나 이야기해보다 포기하던 일들이, 인터넷과 SNS를 통하면 제법 그럴듯한 행사로 변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2013년 1월 홍대 앞의 ‘살롱 바다비’에서 ‘뜻밖의 귤’ 파티가 열렸다. 미술 전공의 대학생들이 알음알음 모여 장소와 콘셉트만 정한 열린 파티를 계획한 것이다. 테마는 귤이다. 누구든 귤을 주제로 무엇이든 해도 좋다. 그래서 모인 사람들은 귤 모양 액세서리를 만들어 팔고, 귤 스타일의 오돌토돌한 피부 얼굴 초상화를 그리고, ‘귤림픽’이라며 작은 스포츠 게임을 벌였다. 판을 벌일 사람은 판을 벌이고, 그 판에서 놀 사람은 놀면 된다. 이런 식으로 솔로 대첩, 베개 싸움 축제, 청소년 만명집결 등의 자발적인 페스티벌이 줄을 잇게 되었다.
때론 일회의 잉여가 아니라 보다 큰 프로젝트로 발전해가기도 했다. 2012년 연말,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세 명의 친구가 ‘과자전’이라는 조그만 디저트 시장을 열었다. 직접 과자류를 굽는 친구들끼리 벌인 소박한 잔치였다. 1회 과자전에는 5명의 셀러가 참여했고 50여 명의 손님이 찾아 왔다. 그런데 점점 인기몰이를 해 규모를 키워가더니, 올해 10월 10일 여섯번째 과자전은 잠실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에서 열렸다. 유료 티켓 1만 장이 순식간에 팔려나갔고, 몰려든 인파로 인해 과자가 매진되어 티켓을 환불해 주어야 할 지경이 되었다. 지난해 10월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는 ‘멍 때리기 대회’가 열려 큰 화제를 모았다. ‘누가 가장 오랫동안 아무 생각 없이 넋을 놓고 있는지’를 겨루는 대회였다. 그런데 두 번째 대회는 올해 중국 베이징의 초대형 쇼핑몰에서 벌어졌다. 잉여들의 놀이가 국제적인 행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상업적 변질과 제도화의 그늘 밖에서 잉여력은 자란다

1 ‘좀비워크’는 세계 곳곳의 대도시에서 매년 열리는 행사로, 서울 행사는 올해 4회째를 맞았다.			2 2014년 10월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1회 멍때리기 대회’ 포스터.			3 셀러와 손님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던 2014년 과자전 행사장.1 ‘좀비워크’는 세계 곳곳의 대도시에서 매년 열리는 행사로, 서울 행사는 올해 4회째를 맞았다.
2 2014년 10월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1회 멍때리기 대회’ 포스터.
3 셀러와 손님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던 2014년 과자전 행사장.

요즘은 주말마다 크고 작은 소셜 페스티벌을 만날 수 있다. 지난 10월 17일 신촌 연세로에서는 ‘이불 영화제’가 열렸다. 친구나 가족들끼리 길거리에서 이불을 덮고 영화를 보는 행사다. 같은 날 가까운 창천 어린이 공원에서는 ‘좀비워크 서울’ 행사가 열렸다. 기괴한 좀비 분장을 하고 나와서 살아 있는 시체처럼 꿈틀거리며 노는 길거리 파티다.
국내에서는 SNS 덕분에 최근에야 소셜 페스티벌 붐이 일고 있지만, 세계적으로는 이와 비슷한 파티들이 오랜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도로의 교통을 통제하고 펼치는 블록 파티(Block Party)는 원래 1차 대전 때 뉴욕 이스트빌리지에서 전사자를 기리며 길에서 벌이던 행사에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불법적인 형태였는데, 경찰들이 대충 눈감아주면서 지역의 색다른 볼거리가 되었다. 레이브 파티나 테크노 퍼레이드도 상업화된 나이트클럽에 반대하는 형태로 벌어졌다. 미식축구나 야구 경기가 벌어지기 전에 미리 주차구역을 맡으려고 모여든 팬들이 잉여의 시간을 이용해 파티를 벌이는 경우도 많다. 늘상 지나다니던 길이나 주차장을 놀이터로 변신시키고, 각자가 조금씩 준비해 멋진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소셜 페스티벌은 숫자도 늘고 규모도 커지고 있다. 그런데 항상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형식만 자발적이지 주최 측의 의도가 너무 뻔하게 보이면 외면받는다. 플래시몹이 광고나 관변 행사의 도구로 상투적이 되었듯이, 소셜 페스티벌 역시 쉽게 활력을 잃어버릴 위험성을 안고 있다. 청소년 폭력 방지, 헌혈 캠페인 같은 페스티벌은 좋은 목적에도 불구하고, 아니 너무 좋은 목적 때문에 호응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사람들은 오히려 시시껄렁하고 느슨한, 뭔가 잉여의 느낌이 주는 재미에 끌린다. 지자체등에서 비슷비슷하게 남발하는 축제에 질리기도 했고, 애정을 가지고 참여하던 행사들이 쉽게 상업적으로 변질되는 모습에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기 때문이다. 규격화되고 제도화된 축제 문화에 식상함을 느낀 사람들이 잉여의 소셜 페스티벌을 만든다.문화+서울

글 이명석
문화비평가 겸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여행의 즐거움과 인문학적 호기심을 결합한 <여행자의 로망백서> <지도는 지구보다 크다> <도시수집가> <모든 요일의 카페> 등의 저서가 있고, KBS 라디오 <신성원의 문화공감>, SBS 라디오 <책하고 놀자>에 고정 출연 중이다.
사진 출처 멍때리기 대회(www.facebook.com/2lectronicship), 과자전(gwajajun.com), 좀비워크서울(www.facebook.com/zombiewalk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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