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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6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 31 변환을 원하는 타인의 삶을 대하는
판사님의 시간

도봉구에 있는 서울북부지방법원

인생에서 잘 잊히지 않는 장면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나도 처음에는 꽤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돼 이리저리 간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지우거나 비우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대략, 간단해졌다. 간단하니 맘이 홀가분한 건 물론 몸까지 가벼운 기분이다. 지금 그런 과거 중의 하나와 아무렇지 않게 마주 서본다. 이 이야기를 쓰기로 마음먹고 생각을 주무르는 동안 의문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아이와 어른의 궁극적 차이는 무엇일까…. 혹시 자아의 제도화에 있지 않을까? 그것이 맞는 답이라면 아이와 어른은 제도화의 총체적 차이로 구분될지 모른다.
이런 의문 때문에 자판을 두드리던 손이 한동안 침묵처럼 멈췄다. 왠지 내가 여전히 어른이 못 됐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아서다. 그러니까 제도화되지 않았을 뿐더러 제도화를 경계하며 버텼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고도 용케 가부장 사회의 권력화된 위계질서에서 살아남은 건 아마 타고난 팔자가 ‘좋아서’였을지 모른다. 아니면 제도권 권력으로부터 한 번도 중요한 인물인 적이 없어서, 위계권력으로부터 경계해야 할, 혹은 사회로부터 분리해야 할 인물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참 다행이다. 게다가 타고난 겁쟁이로 공권력이라면 사이렌 소리에도 심장이 오그라드는 푼수인 걸 누군들 모르랴.
이와 같으면서 불행하게도, 아니 우습게도 호기심은 하늘을 찌르는 편이다. 인도의 델리에서 콜카타까지 함께 여행한 후배가 여행할 당시 쉰 살이 넘은 내게 “호기심이 일곱 살 수준”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일종의 비웃음이나 나무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칠순의 허리까지 살아온 지금도 힘이 허락하는 수준의 호기심은 여전하다. 예를 들자면 어느 지역을 방문하게 될 때도 혼자 모르는 공간을 누비며 호기심을 채우는 즐거움을 맛보는 게 버릇이다.
이런 호기심이 꽂힌 것으로 내 20대 청춘에선 감옥, 형무소, 교도소로 이름이 바뀐 수형자들이 사는 곳이었다.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서 예전의 지형이 상상도 안 되지만 나의 청춘기엔 서대문형무소가 내려다보이는 곳이 있었다. 현저동 산등성이 중턱쯤이었던가? 그곳에서 마치 짐승처럼 형무소의 어떤 기미를 포착하려고 안달했더랬다. 졸작이라 발표는 못 했지만 그맘때 수형자가 나오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하여간 처음엔 그렇게 구경하다가 나중엔 무슨 수를 써서 그곳으로 접근하고 들어가 보았는데 남자 수형자들이 갇힌 곳이었다.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는데 검푸른 죄수복을 입은 ‘교도’라는 죄수가 청소하는 모습까지 본 기억이 난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뒤에 교도소까지는 못 갔지만 그곳과 깊은 연관이 있는 법원 건물로 들어서게 됐다. 지금은 이름도 위치도 바뀐 곳. 내가 그곳에 갈 땐 서울지방법원 북부지원이었다. 그리고 노원구 공릉동에 있었다. 지금은 서울북부지방법원으로 승격됐고, 청사도 도봉역과 1분 거리인 곳에 새로 들어섰다.
나는 이렇게 사법기관의 외형이 우람해지기 전에, 나이가 각기 다른 여자 셋에 남자 하나로 소형 승용차에 동승해서 그곳으로 갔다. 운전은 남자가 했다. 우리 모두 조금씩 비슷하거나 다른 감정을 복잡하게 느꼈을 것이다. 이 글을 완성하기 위해 가족을 이루는 최소 단위의 출발인 결혼으로 돌아가 그때를 회상해야 한다. 결혼식장을 예약하려고 배우자가 될 사람과 함께 어떤 건물로 들어갔는데 접수 창구가 있는 곳은 벽면이 두 짝의 커다란 문인데 그 중 하나는 닫혀 있었다. 상대가 먼저 씩씩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닫힌 문 앞에 내 존재를 감추듯 서 있었다. 무언가 이 절체절명의 순간을 피하고 싶은 열망, 아니 공포감 같은 것이 치밀었다. 저 문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옥죄임. 하지만 결국 그곳에 들어갔고 그 후 오래도록 그 문 안에서 시작된 제도 속에서 살았다.
그러니 그날 작은 승용차로 강북구에서 노원구 쪽으로 가게 된 건 청춘의 내가 겁을 먹었던 문 앞에서 맞닥뜨린 ‘당황’과 ‘두려움’으로부터, 마침내 ‘나오는 문’으로 걸어가는 제도적 걸음이었다.
가정법원 건물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2층인가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내뿜는 기운 탓일까? 어수선하고 토닥거리거나 악다구니를 쓰는 소리도 섞여 있었다. 대개 다른 가정에서 나고 자란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족을 이루는 제도엔 저런 어수선함이 숨어 있기 마련인가 싶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판사님. 중년은 돼 보이던 그분. 서류를 들춰보는가 싶더니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합의했네요.”
“네!”
“네!”
두 사람이 대답하자 그가 얼굴을 들었던가? 그리고 끝이었다. 출구는 간단했다. 다행이었다. 제도라는 것의 무심함? 허술함이 코미디 같았다. 물론 모두 이렇게 단순하고 허술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제도의 틀에 의지하는 것이 내겐 온당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삶을 보호한다는 법이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인생의 갈피와 깊이는 오로지 나의 것이니까.

글·사진 이경자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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