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서울문화재단

문화+서울 seoul foundation for arts and culture

검색 창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

문화+서울

  • 지난호 보기
  • 검색창 열기
  • 메뉴 열기

COLUMN

10월호

안주영 감독의 <보희와 녹양>모래알이면 어때, 반짝이잖아
어떤 사람은 꾹꾹 눌러 담아 배가 볼록해진 여행 가방처럼 삶이 묵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뒷장에 자국이 남을 만큼 꾹꾹 눌러 살아야 한다고 매일 되뇐다.
또 어떤 사람은 젊은 시절, 시련의 깊이만큼 훌쩍 자라날 거라 믿는다.
하지만 매일 쓰러져 아파하면서 뒷걸음질 치는 삶도 있고, 시시해 보여도 그 삶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특별한 시련을 겪어 훌쩍 어른이 된다는 성장담은 어쩌면 믿어보고 싶은 판타지일지 모른다.
모래알처럼 수많은, 별 볼일 없는 시간이 쌓이다 보면 어느새 나이가 들어버린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자라는 일 역시 그냥 남다르지 않은 일상일 뿐이다.

시시해도 괜찮아

엄마와 단둘이 사는 보희(안지호)와 할머니, 아빠와 함께 사는 녹양(김주아)은 같은 날, 같은 병원에서 태어난 친구다. 보희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은 왜소하고 섬세하며 이와는 반대로 녹양은 씩씩하고 당찬 소녀다. 엄마가 낯선 남자와 사귀는 것을 보고 가출을 결심한 보희는 이복누나 집을 찾아갔다가 어린 시절 죽었다고 생각한 아빠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늘 카메라로 뭔가를 찍는 녹양은 아빠를 찾아 나선 보희를 도우면서, 그 과정을 카메라에 담는다.
사라진 아빠를 찾는 동안 보희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데, 모두가 선량한 어른들이다. 누나 남희의 집에서 동거하는 성욱(서현우)은 보희에게 아빠와 함께 나누지 못했던 남자들만의 스킨십(목욕탕에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을 함께 해주며 온전한 내 편이 돼준다. 처음 만난 대학교수도, 엄마의 새로운 남자친구도, 밉살스러워 때려준 친구 부모조차 모두 보희에게 다정하다.
<보희와 녹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사람의 형상을 한 외로움 덩어리들인데, 이들은 서로의 구멍을 들여다볼 줄 안다. 아버지가 없거나, 어머니가 없거나, 둘 다 없거나, 남편이 없거나, 모두 가족 구성원이 조금씩 적다. 하지만 마음이 선량하고 넉넉해서 예쁜 사람들이다. 타인이지만, 결국 하나의 울타리 속에서 서로를 응원하는 유사가족 혹은 친구로 남는다.
아버지가 간직해 온 비밀, 그것이 보희가 아버지 없이 자란 이유이고, 보희의 엄마가 혼자 남겨진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숨겨진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보희의 마음에는 그늘이 지지 않는다. 보희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대신,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들을 더 소중히 여기는 아이가 된다.
안주영 감독은 그저 모래알처럼 특별할 것 없는 아이들을 통해, 숱한 작은 상처와 그것을 위로하는 하나하나의 진심이 모여 현재의 내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대단한 성장담은 없지만, 우리 모두 조금씩 자라나 지금의 내가 됐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긍정하게 한다.

작정 없이 자라는 우리들

영화의 도입부는, 한 남자가 물속으로 사라지는 영화의 엔딩 장면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보희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보희와 녹양이 투덕대면서 극장을 빠져나가면 영화 속 영화의 엔딩 타이틀이 뜨는데 그 제목이 <보희와 녹양>이다. 보희와 녹양의 이야기는 영화 속 영화가 끝나는 순간, 비로소 시작되는 셈이다.
사실 아무리 좋은 영화를 봐도 내 인생이 휘청거릴 만큼의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안주영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 우리 삶이 영화를 보는 순간에도, 영화가 끝난 후에도 별다를 것 없이 일상적으로 이어짐을 보여준다. 시시한 것 같아 보여도, 특별해지지 않더라도 시간은 흐른다. 그러니 멈춰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내리막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우리의 시간은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영화에서 녹양은 영상을 찍어 뭘 하려느냐는 어른의 질문에 “꼭 뭘 해야 하느냐고, 찍다 보면 뭔가가 만들어지지 않겠느냐”고 되묻는다. 소소한 아이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 아빠 찾기라는 에피소드조차 요란스럽지 않게 품어내는 영화 <보희와 녹양>은 살짝 내 몸을 감싸준 맑은 날의 바람 같은 영화다. 그래서 격한 감동 대신 잔잔하게 설핏 미소를 짓게 만든다.
안주영 감독은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 전 온통 수수께끼투성이인 세상의 기호 속에서 아이들과 덜 자란 어른의 고독과 외로움, 상실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작정 없이 시시한 삶을 무시하거나 거짓말을 비난하지 않는 감독의 시선이 딱 우리의 눈높이에서 마주친다. 마음을 못나게 만드는 결핍은 흔히 타인에게 생채기를 내는 법인데, <보희와 녹양> 속 인물들의 부족함은 타인을 더 넉넉하게 품어내는 곁이 된다. 그 마음들이 모래알처럼 작지만, 또 반짝반짝하다.

<보희와 녹양>(2019)
감독 안주영
출연 안지호(보희 역), 김주아(녹양 역), 서현우(성욱 역), 신동미(보희 엄마 역)
글 최재훈_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위로 가기

문화+서울

서울시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Tel 02-3290-7000
Fax 02-6008-7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