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실패> 초판 표지.
어찌어찌 서른 살은 넘긴 해, 지금 세어봤더니 40년도 더 지난 때였다. 그때의 사진을 보면 얼굴은 젊은데 표정은 슬픔과 어둠이 짙어 보인다. 마음이 그랬던 것 같다. 내가 간절히 원하고, 그 일을 해서 행복감을 느끼는 일들과 높은 담을 쌓고 살아야 하는 현실 탓이었다. 담을 뛰어넘고 싶은데 뛰쳐나가면 안 될 것 같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이었다.
이럴 때면 엄마를 찾았다. 어떤 땐 그저 엄마 앞에서 저절로 눈물이 줄줄 흘러 말 한마디 못했다. 삯바느질을 하던 엄마가 내게 말했다. “대나무를 봐라. 사는 것도 대나무와 같단다. 매듭이 있잖니? 그 매듭을 넘고 넘는 게 사는 거란다…….”
엄마는 인생의 고비들을 대나무의 매듭에 비유했다. 그 매듭. 이제껏 크게 몇 번 넘긴 것 같다. 큰 매듭 사이에 자잘한 매듭들은 아마 눈금자들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자잘한 매듭들. 내 손금에도 자잘한 ‘고생과 근심’들이 많다고, 그 방면의 전문가가 말한 적이 있었다.
오늘 여기에 소개하는 오류동 재래시장에서의 깨달음은 그러니까 내게 아주 큰 매듭을 넘게 해준 사건 중의 하나였다. 또래보다 자그마하게 자라던 아이를 데리고 동네 재래시장으로 나가곤 했다. 딱히 물건을 살 게 없어도, 사람살이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는 시장에 가면 가라앉은 내면에서 생기가 감도는 게 느껴졌었다. 푸석하게 메마른 흙길 같던 마음에도 물기가 서려서 불행감이 가라앉았다. 호떡을 사서 아이와 함께 먹으며 시장의 골목골목을 걸어 다니면 싱싱하게 출렁이는 삶의 가운데로 뒤섞이는 기분에 흥건히 젖어들었고 그런 상태가 반갑고 좋았다. 그래서 재래시장으로 갔었다.
하여간 그런 날들 중의 어느 하루였다. 시장 어귀던가? 한복판이었던가? 불현듯 어떤 깨달음 하나가 뜨겁고도 둔중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순간 넋을 놓았다. 모두 다르면서 똑같은 것 하나가 마치 생물(生物)처럼 나를 덮쳤다.
조금 지나 정신을 차린 뒤에 그것이 ‘주눅 들림’이라는 걸 깨달았다. 주눅 들림. 나는 이 의미에 붙들렸고 서서히, 그리고 급격하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깨닫기 전과 후의 나는 달랐다. 겉은 같아도 내면의 기운은 달라지고 있었다. 상점과 좌판 사이를 미어터지게 지나다니는 여자들의 표정에서 보였던 똑같은 주눅 들림은 나이, 빈부, 학력 등과도 상관이 없고, 세련된 화장이나 비싼 옷차림이나 섬세한 머리치장으로도 감춰지지 않았다. 어쩌면 본인조차 절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지 모를 그것. 싱싱한 꽃을 억센 손아귀로 잡았다 놓은 것 같은 겹겹의 주눅 들림이었다. 왜 그렇게 보이고 느껴졌을까? 이 강렬한 접신(接神) 같은 경험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았고 그것은 결국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변화시켰다.
내가 그 당시 결혼한 여자가 아니었다면, 맏며느리가 아니었다면, 아들을 절실히 바라는 집에서 딸을 낳은 만혼의 며느리가 아니었다면, 소설가가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물론 기질적으로 반항심이 강한 편이었던 나에게 결혼이란 제도에서의 다양한 차별은 적응하기 힘겨웠다. 하지만 적응하지 않으려면 탈출하거나 파문(破門)되어야 했다. 그래서 늘 삶이 불안하고 불길하고 초조했다.
이후 억제할 수 없는 열망이 하나 생겼다. 여성 개개인의 다양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저 주눅 들림과 억압의 기미는 무엇인지 알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광화문의 서점에 가서 여성이란 글자가 들어간 가지가지 책들을 사서 집으로 돌아올 때의 그 떨림은 아직도 생생하다. 현재 몇 차례 개정을 거듭한 것과는 다른 <친족상속법>을 샀다. 집에 와서 독학을 시작했다. 특히 친족상속법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자식은 무턱대고 아버지의 ‘소유’였다. 이 부분이 제일 걸렸다. 나도 경험한 바에 의하면 아이는 어머니가 자궁에 임신해서 낳은 존재였다. 이 확실한 사실을 두고도 자식을 아버지의 가계(家系)에 묶어 부부가 이혼할 경우 어머니는 친자를 잃었다. 이 생물학적 무지는 야만으로 느껴졌고 나는 ‘혼자’ 격분했다. 불행한 삶을 산 어머니, 어제도 남편으로부터 모욕적인 대접을 받은 아랫집 여성, ‘출가외인’의 잔인함이 미풍양속으로 미화되어 서러웠을 딸들. 내겐 이 숙제를 푸는 것이 여성 소설가로서의 사명으로 느껴졌다. 이혼한 여성들을 만나고 맞벌이하는 여성들을 만나고 시어머니와의 불화로 힘들어하는 여성들을 만나고 빈민 여성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파렴치한 경로를 통해 매매춘에 종사하게 된 여성들을 만났다. 혼인빙자간음으로 질곡에 빠진 여성들도 있었다.
이즈음 놀랍게도 이런 일이 생겼다. 어느 여성 잡지에서 여성도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다는 특집을 하면서 내게 원고를 청탁했다. 며느리에게 시동생들을 도련님, 아기씨로 부르게 하는 건 옳지 않다, 며느리를 하녀의 신분으로 규정하는 것이니 ‘아니오’라고 해야 한다, 등등. 공교롭게도 이 글을 아이의 할아버지가 서점에서 읽었다. 며느리인 내게 총체적 해명을 요구하고 더불어 반성문을 바랐다. 내겐 코앞에 떨어진 불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해명은 했지만 반성문은 써지지 않아 못 썼다. ‘차이’는 반성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므로.
결국 나는 저 재래시장에서의 그날로부터 비롯된 깨달음을 숙제하듯 열두 가지의 상황으로 나누어 소설로 썼다. 1988년, <절반의 실패>라는 여성주의 소설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재래시장에서 비롯된 의문 하나가 책으로 탈바꿈하는데, 10년쯤 걸렸나? 아니면 딸로 태어나는 순간에 ‘의문의 씨앗’ 하나가 생겼던 걸까.
- 글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