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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4월호

이경자의 서울 반세기, 공간을 더듬다은행나무 집과 함께 내 불경(不敬)도 사라졌을까?

은행나무 집

충무아트홀에 갈 일이 생겼다. 지하철 4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내려 마냥 꾸역꾸역 걸었다. 내키지 않아도, 힘이 들어도 한 발 한 발 움직이면 결국 닿아야 할 곳에 이른다고, 인생살이란 결국 이런 것이라고, 나 자신에게 말해주는 건 어려울 때 거는 자기최면이다. 이런 최면은 버릇이 되었다. 그날도 그래서 마침내 충무아트홀에 닿았고 늙은이의 열등감 때문에 예정보다 일찍 대었다. 늦지 않은 것이 스스로 만족스러워, 건물 앞에 서서 좌우로 펼쳐진 길과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맑지 않거나, 해가 반짝 나지 않으면 사람 사는 곳은 대개 우중충하다. 이날도 그랬다. 하지만 우중충함 때문에 과거로 침잠해서 불현듯 추억에 잠길 수 있었다.
이곳은, '신당동'이었다. 신당동의 은행나무 집을 알고 있는 우리들, 김동리 선생님의 제자들은 정말 많다. 우리들은 대부분 전차와 버스를 한두 번은 갈아타고 광희초등학교 앞 정거장에서 내렸다. 양쪽으로 낮은 집들의 담장과 지붕이 보이는 골목길은 복잡하고도 따스한 사람살이의 온기가 느껴져 마음을 놓이게 했다. 그렇게 조금 더 가면 선생님 댁의 숲을 이룬 정원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신당동 집으로 옮겨간 것은 1958년 4월 그믐께, 라일락이 온통 뜰을 뒤덮다시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145평쯤 되어 보이는 대지였으니까. 그 당시로서는 아주 넓은 뜰이었는데, 아무것도 정성 들여 꾸며진 것은 없는 대신 큰 은행나무 여섯 그루와, 향나무 열 몇 그루와, 주목 단풍나무 잣나무가 각각 두세 그루씩 둘러서고, 정면에는 라일락 큰 나무가 세 그루나 서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몇 해를 지내니 뜰은 그대로 수풀로 변했다. 수풀이라야 백 평 미만이건만 우거진 녹음 속에선 백 평이 백리 맞잡이였다. 가을이 되면 여섯 그루의 은행잎들이 모두 황금이 되어 뜰 위에 수북이 쌓여졌다. 나는 술이 취해 들어오는 밤이면 으레 이 은행잎 위에 가 뒹굴곤 하였다……."
김동리 선생님의 수필 <이사기>(移徙記)에서 옮겨 적었다. 선생님의 키는 기록에 따르면 158센티미터였다. 남자로는 크지 않은 키긴 하였다. 잘 익은 알밤처럼 단단해 보이셨던 선생님. 술이 취해 노란 은행나무 단풍잎이 쌓인 위로 뒹구시는 모습이 눈앞에 훤히 그려진다. 하나의 우주였을 한 사람의 생애 중 한 면을 너무도 잘 드러내는 모습이다.
선생님 댁에 처음 간 것은 서울 생활의 첫해 여름이었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너무도 무모한 꿈 하나는 하늘의 별보다 아득했고, 더 아득한 건 처치 곤란한 내 희망이었다.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밥은 입으로 먹는다, 옷은 몸에 걸치는 섬유다, 잠은 방에서 잔다, 아마 이 정도만 확실하게 알고 견뎠던 것 같다. 열등감과 불확실한 미래와 캄캄하고 어지러운 희망은 나를 늘 벼랑 끝에 선 기분으로 몰아붙였다. 아마 젊음이란 이런 것일지 모른다. 불안과 두려움과 무모함을 뭉뚱그리지 않고 젊음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촌에서 와 등 비빌 데 한 군데 없는 열아홉 살 여자아이의 나날을 떠올리니 지금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도대체 소설은 무얼까, 어떻게 써야 할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만 용광로처럼 들끓던 시절. 나는 다양한 폭력의 뒤에 숨어서 세상을 빼꼼히 바라보곤 했다. 그 당시 내 청춘은 죽음과 동의어였던 거 같다.
그날, 아마 공중전화로 허락을 받아 신당동에 갔을 것이다. 손소희 선생님께서 날이 덥다며 목욕부터 하라고 하셨다. 목욕을 했다. 김동리 선생님은 서예를 하고 계셨지 싶다. 그 일이 끝난 뒤에 냉면이 먹고 싶다고 하셨다. 손 선생님이 사양하셔서 김동리 선생님을 따라 골목 어딘가에 있는 허름한 냉면집으로 갔다. 나는 그저 선생님과 둘이 밥을 먹는다는 것에 가위 눌려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식탁에 얹힌 그 냉면 그릇. 놀라웠다. 난생처음 그런 이름의 음식을 먹어보았으니까. 내가 여태 먹은 건 메밀로 눌러서 먹는 막국수였다.
나도 참 많이 늙었다. 학교에서 가르친 일이 없어 제자는 없지만 후배들은 많다. 선생님처럼 대문을 열어젖히고, 아니 대문은 없으니 아파트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후배들을 맞아들일 수 있는가. 덥다고 목욕부터 하라는, 육친의 수더분함과 흉허물 없음을 생활태도로 가질 수 있을까. 내 용렬(庸劣)함으론 어림도 없는 일이다.
"……나는 이 집에서 내 인생을 마칠 생각이었다. 벽장까지 모두 여섯 평짜리 내 서재라는 것이 책과 수집품과 서예뭉치와 스크랩 따위로 거의 천장까지 찰 지경이었고, 뜰에 하나 가득 찬 나무들이란 것이 또한 내 가족같이 느껴져서 이것들을 허물어뜨리고 딴 데로 옮겨 간다는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그 집에서 25년 6개월을 사셨다. 신당동 은행나무 집의 뜰과 두 분 선생님의 모습은 여전히 제자들의 그리움 속에, 그리고 추억을 되살리는 글 속에 살아 있다. 그동안 주소지 이름도 여러 번 바뀐 은행나무 집. 광희초등학교도 없어지면 어쩌나, 이 글을 쓰는 지금, 조마조마하다.
글 이경자_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소설가
사진 김영호_서울문화재단 혁신감사실 혁신기획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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