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희망은 없다
<부산행>이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장르영화의 뻔한 속성과 신파적 요소를 통해 상업영화의 외피를 가졌던 것에 비해, 블록버스터를 벗겨낸 <염력>의 민낯은 거칠고 예쁘지 않다. 우연히 초능력을 얻은 아비 ‘석헌’(류승룡)이 제구실을 하려나 기대해보지만, 그는 어떤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연상호 감독은 흉포한 공권력 앞에서, 초능력이라도 있어야 겨우 맞설 수 있다는 현실을 대놓고 관망하고 비웃는다. 승리도, 화해도, 사죄도 없다. 와르르 무너진 집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건 집을 잃은 자의 몫이다.
어쩔 수 없이 용산을 연상시키는 장면에서도 공권력에 맞선 서민들의 목소리는 결국 가닿을 곳 없이 길을 잃는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변화의 소동 앞에서 싸웠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부유물처럼 둥둥 떠 있다. 계층적 문제는 여전하고,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소수를 짓밟아온 역사는 되풀이된다. <염력> 속 인물들 앞에 놓인, 혹은 연상호 감독이 바라보는 한국은 여전히 희망이 없다.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철옹성 같은 기득권, 흙수저 소시민은 초능력을 얻어도 결국 영웅이 되지 못하는, 근원적 족쇄는 끊을 수가 없다.
연상호 감독은 아주 극단적이고 잔혹한 방식으로 한국 사회의 지옥 같은 속살을 칼날처럼 헤집으면서 질주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2011년 <돼지의 왕>, 2012년 <창>, 2013년 <사이비> 연작을 통해 학교 폭력, 군대 폭력, 그리고 종교 문제를 그렸다. 뚜렷한 선인도 악인도 없이 모두가 비겁하고 모두 조금씩 나쁘다. 그는 광기 어린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누가 더 나쁜 사람인가에 대한 일종의 지옥도를 그리는 데 익숙하다.
<염력>은 연상호 감독의 앞선 애니메이션과 궤를 같이한다. 장르영화의 관습에서 매끈하게 벗어나 있진 않지만, 슈퍼 히어로의 외피를 입은 영화 안에 오늘의 한국을 녹여내는 솜씨는 여전하다.삶의 터전을 허망하게 잃은 철거민들의 이야기에 대해 우리는 근원적 죄의식을 가진다. 그리고 알고 있다. 또 다른 곳에서 삶의 터전을 이뤄 살아가지만 그 끝이 희망이진 않을 것이다. 영화 속 ‘루미’(심은경)가 지키고 싶은 것은 그냥 어머니와 자신의 삶을 이어줄 치킨 집 하나다. 어느 날 재개발 앞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지키고 싶어 하는 삶의 터전을 둘러보면, 연민보다는 슬픔이라는 공감대의 띠가 둘러쳐진다. 거기에 공권력이 국민을 절대 지켜주는 법이 없는 현재를 빗대 녹였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 공포는 시작된다
“진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처음부터 이기도록 태어난 사람들.” 연상호 감독의 <염력>에 등장하는 ‘홍상무’(정유미)의 대사다. 세상 해맑은 표정으로 남의 손을 빌려 때리고, 부수고, 협박하는 그 순간에도 말간 미소를 잃지 않는 홍상무. 형식적으로 고개를 조아리지만, 단 한 번도 진짜 벌을 받은 적이 없는 맑은 표정의 악당들과 홍상무의 천진한 오만함이 겹쳐 보인다. 우리는 홍상무의 표정을 한 그들이 말간 미소를 지으며 교도소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이미 익숙할 만큼 자주 보아왔다.
영화 속에서 초능력은 아비에게 주어졌지만, 영화 속에서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권력을 가진 사람은 홍상무이다. 폭력을 행사하고, 여론을 조작하고, 공권력의 힘을 비틀어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다. 그는 어느 순간에도 벌을 받지 않는다. 애초에 이기도록 태어난 사람, 뒤늦게 초능력을 가져도 절대 이길 수 없는 사람이다.여기에 계속 변질되기만 할 뿐, 한 번도 온전하지 못했던 우리 사회, 오늘도 안녕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이 힘없이 겹친다. 그런 점에서 <염력>은 초능력으로도 구하지 못한 서민들의 삶과 한국이라는 사회적 지형도에 대한 씁쓸한 코미디 그 자체가 된다. 비로 소 소름 돋는 진짜 공포는 그 자각과 함께 영화가 끝나는 순간, 시작된다.
- 글 최재훈 영화감독이 만들어낸 영상 언어를 지면 위에 또박또박 풀어내는 일 이 가장 행복한 영화평론가.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각종 매체에 영화 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