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7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현장.
열기가 너무 뜨거워서였을까? 하늘은 비를 흩뿌렸다. 적당했다면 시원하고 좋았을 텐데, 문제는 그 양이 너무 많았다는 것. 첫날 크래쉬,
드림 시어터, 딥 퍼플 등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간신히 공연을 마쳤지만, 다음날 공연은 모두 취소되고 말았다. 진흙 펄로 변한 바닥은 신발을 삼켜버렸고, 텐트를 치고 야영하던 이들은 한밤중에 인근 초등학교로 대피해야 했다. 이듬해인 2000년 공연기획사 예스컴은 다시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을 추진했지만, 티켓 판매 저조로 한 달 만에 취소하고야 말았다.
이렇게 국내 첫 록 페스티벌이 불운의 뒤안길로 사라지나 싶었는데,
다행히 명맥을 잇는 곳이 나타났다. 부산시가 주최하는 부산 국제 록
페스티벌이 2000년 처음 열렸다. 무료로 볼 수 있는 부산 록 페스티벌은 올해로 18회를 맞은 장수 축제가 되었다. 서태지가 국내외 밴드들을 초청해 연 이티피(ETP)페스트도 2000년 광복절에 첫선을 보였다.
이티피페스트는 2004·2008·2009년 세 차례 더 열린 뒤 사라졌다.
일회성 록 페스티벌도 간간이 열렸다. 2001년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메탈페스트에는 슬레이어, 머신헤드, 세풀투라 등 세계적인
헤비메탈 밴드들이 출연했으나, 드넓은 운동장에서 500명 남짓한
관객들만이 헤드뱅잉을 하던 광경은 생각만으로도 눈물겹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열기가 채 가시기 전인 그해 7월 서울 잠실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에서는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등 외국 밴드와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맹활약한 윤도현밴드, 크라잉넛, 레이지본 등이 총출동한 ‘원 핫 데이’ 페스티벌이 열렸다.
록 페스티벌 문화가 자리 잡다
2006년 국내 록 페스티벌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단 한 차례 열리고 사라졌던 비운의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이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로 부활한 것이다. 예스컴에서 이름을 바꾼 아이예스컴과 1999년 당시 예스컴에 있다가 독립한 김형일 대표의 기획사 옐로우나인이 공동 주최사로 나섰다.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은 매년 꾸준히 열리며 국내에 록 페스티벌 문화를 자리 잡게 했다.
하지만 2009년 2개의 페스티벌로 쪼개지는 사태를 맞았다. 갈등을
빚어오던 두 공동 주최사가 갈라서면서 아이예스컴 주최의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과 옐로우나인 주최의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이
같은 날 동시에 열리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결과는 외국 밴드 섭외를
주로 맡아온 옐로우나인의 완승. 출연진이 훨씬 더 화려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은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 한두 주
뒤로 날짜를 옮겼다.
2010년에는 이전까지 투자자로만 나섰던 CJ E&M이 아예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 주최사로 나섰다. 2012년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은 세계적인 밴드 라디오헤드를 출연시켜 역대 최다 관객인 연인원 11만명을 모았다. 지금껏 국내에서 록 페스티벌이 가장 흥했던 시기로 꼽힌다.
록 페스티벌이 좀 된다 싶었는지 우후죽순 늘어나던 때도 있었다.
2013년 여름에는 수도권에서만 무려 5개의 록 페스티벌이 열렸다.
우선 전통의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과 지산에서 안산으로 장소를 옮긴 CJ E&M의 안산 밸리 록 페스티벌이 있었다. 여기에 2012년부터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열기 시작한 도심형 페스티벌 슈퍼소닉,
기존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에 장소를 제공하던 지산 포레스트 리조트가 독자적으로 개최하는 지산 월드 록 페스티벌, 간간이 세계적인
팝스타의 공연을 열어온 현대카드가 록 페스티벌 형태로 판을 키운
시티브레이크까지 가세했다. 그해 여름 한정된 록 페스티벌 시장을
나눠 가진 5개 주최사는 그 누구도 웃지 못했다. 이후 슈퍼소닉, 지산월드 록 페스티벌, 시티브레이크는 하나둘 자취를 감췄다.
2 폭우로 공연이 중단된
1999년 인천 트라이포트 록
페스티벌.
3 2012년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
록 페스티벌의 원초적 매력
2016년, 이전까지 안산에서 열리던 밸리 록 페스티벌이 다시 지산으로 돌아왔다. 안산 대부도 바다향기테마파크에 적지 않은 비용을 들여 페스티벌 전용 부지를 조성했지만, 감사원의 규정을 어긴 것으로
뒤늦게 적발됐기 때문이다. 절치부심한 CJ E&M은 이름을 지산 밸리록 뮤직앤드아츠 페스티벌로 바꾸고 록뿐만 아니라 팝, R&B, 소울,
힙합,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거리예술까지 아우르는
축제로 확장했다.
올해 7월 28~30일 열린 지산 밸리록 뮤직앤드아츠 페스티벌에 가보니 안산 시절보다 쾌적한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마지막 날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가상 밴드로 기네스북에 오른
고릴라즈의 무대는 요 몇 년 새 본 공연 중 단연 최고였다. 8월 11~13일 송도 달빛축제공원에서 열린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도 자신만의 색깔을 지키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푸른 잔디가 깔린 송도 달빛
축제공원은 비만 오면 갯벌처럼 변하던 예전의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늘막 텐트에 돗자리를 깔고 유유자적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과거엔 찾아보기 힘들었던 여유마저 느껴졌다.
이제는 예전만큼 록 페스티벌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지 않는다. 대세가 된 EDM(일렉트로닉 댄스 뮤직) 축제에 훨씬 더 많은 이들이 몰린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매년 여름이 되면 록 페스티벌을 찾을 것이다. 누가 출연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록 페스티벌만의 열기, 자유, 여유, 그리고 소소한 일탈이 좋다. 백발이 성성해져도 나는 그곳에 가고 싶다.
- 글 서정민_ 씨네플레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