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연말에 한 신문에서 정리한 ‘스타 인기 기상도’를 보면 “오구년에 만들어진 영화는 100여 편에 이르는데 이 중 히로인을 맡은 주역급 스타들은 남녀 합해서 10명 미만 정도다. 여우진(女優陣) 신인으로는 역시 김지미와 엄앵란이 인기스타로 화려하게 움직였다”고 나와 있습니다.
<사진 1> 1950년대 말 배우 김지미의 모습.
모란처럼 아름다운 배우, 김지미
<사진 1>은 17세에 고 김기영 감독에게 길거리에서 캐스팅됐던 김지미 씨의 데뷔 초, 1950년대 말의 모습입니다. 1957년 영화 <황혼열차>로 데뷔한 김지미 씨는 다양한 작품에서 매혹적인 이미지를 선보이며 미의 대명사로 불렸습니다. 모란이 그려진 화투패를 ‘김지미패’라고 했을 정도니까요.
요즘 젊은이들은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김지미’ 대신 ‘김태희 같다’,
‘전지현 같다’는 표현을 쓰죠. 세월이 지났지만 미의 기준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은 모두 장희빈
역할을 연기했다고 합니다. 장희빈 역할은 1961년 영화 <장희빈>에서 김지미 씨가 처음 연기했습니다. 이후 여러 여배우를 거쳐 김태희씨가 2013년 SBS에서 방송된 사극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9대
장희빈’을 맡았습니다.
김지미 씨는 요즘 짧게 자른 은발의 머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여배우 특유의 멋을 잃지 않았습니다. 김지미 씨는 올해 데뷔
60주년을 맞았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최근 <매혹의 배우,
김지미> 특별전을 열어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1959), <춘향전>(1961), <춘희>(1967), <토지>(1974), <길소뜸>(1985), <티켓>(1986) 등 김지미 씨의 대표작 20편을 상영했습니다.
특별전 개막식에 참석한 김지미 씨는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어떤 작품이든 찍고 나면 부족한 점이 많아 조금 더
열심히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항상 남는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또
“배우는 영화의 가장 큰 소재다. 그 소재를 값싸게 굴리지 말고 소중히 해야 좋은 영화가 생산되고, 상품이 값어치 있어지는 것”이라며
“배우는 아무 데서나 명예나 이름을 팔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고 후배들에게 조언했습니다. 김지미 씨는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지냈으며 영화제작자로도 활동했습니다.
<사진 2> 1959년 한 패션쇼에서 ‘아리랑 드레스’를 선보이고 있는 배우 엄앵란.
청춘 배우에서 푸근한 어머니로, 엄앵란
<사진 2>는 1959년 한 패션쇼에서 개량한복 형태의 ‘아리랑 드레스’를 선보이고 있는 엄앵란 씨의 모습입니다. 엄앵란 씨는 1956년 반도
호텔에서 열린 한국 최초의 패션쇼 무대에 서며 모델로도 자리 잡았습니다. 당시에는 전문 패션모델이 드물어 여배우들이 패션쇼에 등장했다고 합니다.
1956년 영화 <단종애사>로 스크린에 데뷔한 엄앵란 씨는 1964년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호흡을 맞춘 당대 최고의 배우 신성일(강 신성일) 씨와 결혼했습니다. 당시 두 사람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두 사람이 없으면 한국영화 제작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나왔을 만큼 수많은 작품에 주연으로 나섰습니다. 서울 워커힐에서 열린 두 사람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3,500명이 넘는 팬들이 몰려 일대가 마비됐고, 기마경찰까지 동원됐다고 합니다.
엄앵란 씨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하게 방송 활동을 펼치며 푸근한 ‘어머니’ 이미지로 대중에 어필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유방암
수술을 한 후 자신의 삶을 진솔하게 풀어내는 강연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또 최근에는 신성일 씨도 폐암 판정을 받고 투병 중인 가운데
부부가 서로를 격려하며 병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 사진 김천길_ 전 AP통신 기자. 1950년부터 38년 동안 서울지국 사진기자로 일하며 격동기 한국 근현대사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 글 김구철_ 문화일보 문화부 기자. 대중문화팀장으로 영화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