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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호

만화가 이종범자아를 이해하고, 세상을 살피는 일
만화가 이종범이 연재하는 <닥터 프로스트>는 2021년 2월 2일 연재 10주년을 맞고, 상반기 결말을 예고했다. 그는 대학교수·한국만화가협회 이사 등 웹툰 연재 외 다양한 활동을 하며 《그래, 잠시만 도망가자》 《웹툰스쿨》을 발간한 저자이기도 하다.
어릴 적 자신을 울리고 웃긴 만화에 빠졌고 이제는 본인이 만화를 그려 독자를 울리고 웃긴다. 새롭고 참신한 이야기를 전하는 작가도 있는 반면, 중요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작가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세상 흐르는 모습을 보며 만화를 그리는 그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건넨다.
“큰 불을 끌 때, 중요한 게 뭔지 혹시 아세요? ‘불길’을 보는 거래요. 어디에서 시작된 불인지… 다음에 옮겨붙을 지점은 어딘지… 그 길을 미리 읽어서 막아가면서 끄는 거죠. 제가 할 일은 그 불길을 보는 거예요. 그런데 최근의 불들은 뭐랄까. 자꾸 어딘가로 옮겨붙을 것 같단 느낌이 든단 말이죠.”
네이버웹툰에서 10년째 연재 중인 이종범 작가의 만화 <닥터 프로스트>의 경찰 강유리 과장이 한 말이다. 어떤 현상이 발생하면, ‘그것은 어디에서 시작했을까’ ‘어디로 어떻게 번질까’ 고민하는 일이 작가가 할 일 중 하나가 아닐까. 최근 그는 세상의 ‘불길’을 살피며 만화 창작의 영감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 웹툰 연재 외 활동에도 참여한다. 팟캐스트 <이종범의 웹툰스쿨>을 진행하고, 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서 스토리텔링의이해 등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제4회 정부혁신제안 끝장개발대회에 참여해 ‘누구도 외롭지 않은 사회’를 주제로 자신의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이외에도 가끔 글을 쓰거나, 청소년 진로를 위해 강연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낸다. 인터뷰를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그가 자신을 소개하는 단어는 간단했다. “만화가 이종범입니다” 혹은 웹툰 작가라고 소개하는 그는 만화를 어떻게 시작했을까.

한 소소한 동기가 어떻게 진화하는가

그는 8살부터 만화를 그렸다. 계기는 어린 나이답게 귀엽고 단순하다. 어느 날 어린 이종범은 학교에서 《드래곤볼》의 국내 해적판 《드라곤의 비밀》 한 장면을 따라 그렸다. “잘 그렸네” “나도 그려줘” 또래 친구들의 칭찬이 쏟아졌다. 신기한 듯 그림을 구경하는 친구들의 반응은 그에게 묘한 쾌감을 안겨줬다. 그는 쾌감에 이끌려 꾸준히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만화를 그리고, 다양한 만화를 찾아봤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는 친구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만화에 빠진 꼬마 아이였다.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진짜 사나이> 등 《소년챔프》와 《아이큐점프》에 실린 여러 만화가 그에게 감명을 줬지만, 의미 그대로 그는 만화가 무엇인지 몰랐다. 그에게 만화는 여전히 막연했다. 중학생 때 우연한 사건으로 일러스트와 만화를 처음 구분했을 정도니까. 그가 다니던 학교 후문 쪽에는 이름 모를 만화가가 살고 있었다. 그는 소문을 듣고는 그동안 그린 그림을 들고 만화가의 집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그곳에서 수염을 깎지 않은 만화가가 문을 열었다. “그럼 그동안 쓴 스토리를 좀 볼까?” 다행히도 친절한 만화가는 어린 이종범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질문을 했다. 하지만 그는 당황했다. 지금껏 만화를 그린다고 수많은 그림을 그렸지만, 이야기는 없었다. 그가 그린 만화는 없었다. 어린 나이에 충격을 받은 그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만화가 아저씨’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학교 공부와 만화 작업을 병행했다. 쉬는 시간 10분 동안 방금 들은 수업을 복습하고, 점심시간 내내 오전 수업 내용을 복기했다고 말한다. 집에서는 절대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만화를 그렸다. 중학교 3년 내내 밤마다 만화를 그리며 라디오 <배유정의 영화음악>이 끝나는 새벽 3시 즈음 잠이 들었다.
친구들에게 관심받기 위해, 소소한 동기로 시작한 만화가 어느새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는 한 에세이에서 ‘소소한 동기’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주인공의 동기는 스토리를 쓸 때에도 아주 중요한 요소다. 주인공이 행동하는 이유가 독자를 납득시키지 못하면 독자들은 만화에 전혀 감정을 이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주인공의 동기는 처음에는 작고 소소하다. 중요한 것은 ‘작고 소소한 동기가 조금씩 진화하는 것’이다.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는 채소연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농구를 시작한다. 정말이지 불판 위의 에탄올처럼 순식간에 증발할 수도 있는 미약한 동기다. 하지만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강백호의 동기는 눈부시게 진화하고 결국 그는 자아의 신화를 어느 정도 이루어낸다. 개인적으로 동기의 진화에 도움을 주는 것들은 라이벌, 멘토, 그리고 바닥을 치는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 하지만 이 모든 요소보다도 내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취 경험이다.”


이종범 자신의 삶과 닮았다. 친구들에게 관심받는 쾌감을 좇아 꿈을 키워간 아이는 2021년 마흔 살이 되도록 만화를 그리고 있다. 고등학생 때는 만화 동아리 ‘이미지 링크’에서 회장으로 활동하고, 수능 당일 시험이 끝나자마자 만화책 한 권을 엮기 시작했다. 열정을 전부 쏟아낸 걸까. 성인이 되고 7년가량 만화가가 된다는 말만 하며 만화는 그리지 않았다. ‘작가를 하려면 인문학이 도움 되겠지’하는 어렴풋한 생각과 시험 성적을 고려해 연세대학교 심리학과에 진학했고, 음악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이유로 악기를 배웠지만, 정작 만화는 그리지 않았다.
“만화랑 의무적 관계라면, 음악은 연인 느낌이었어요. 음악으로 돈도 벌리니까, 직업으로 삼을까 생각했죠. 그런데 공연장에서 신나게 연주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지금, 무대 아래서 음악 듣고 춤추는 관객이 정말 신나고 즐거울까 조금도 관심 없구나. 나는 신나는데, 누군가가 신나지 않으니까 환불을 요구하면 반박할 논리가 없더라고요. 만화를 그릴 때는 그러지 않았거든요. 내가 그린 만화를 친구에게 보여주면서 개그 타이밍인데 웃어줄까. 반응이 없으면 고쳐 그려서 만족을 주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었어요. 그게 직업이잖아요.”
그는 다시 만화를 그리기로 결심했다. 2009년 《스포츠투데이》에서 원고료를 받으며 연재한 <투자의 여왕>이 데뷔작이다. 2010년 1월 데뷔작을 끝내고, 출간한 단행본을 손으로 직접 만졌으니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유쾌한 감정은 잠시만 머무는 걸까. 그는 데뷔작을 완결한 후 1년간 자신의 무력함을 절감했다. 네이버웹툰에 도전하기 위해 담당자에게 작품을 보여줬지만, 거절당했다. ‘자살한 펀드매니저의 뒤를 둘러싼 암투’ ‘세태 풍자 학원 액션물’ ‘살아남기 위해 강해져야만 했던 소년의 이야기’ 등 총 6개 작품이 서랍으로 들어갔다. 같은 작업실을 사용하는 동료들은 연재를 이어가며 차기작을 준비하는데, 그는 그들에게 밥을 얻어먹거나 돈을 빌렸다. 당시 나이 29살이기에 그는 불안했다. 불안을 떨쳐버리고 일어나기 위해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의 스토리 분석, 작법서 탐독, 자기 스토리 만들기 세 가지에 매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 2월 2일 <닥터 프로스트> 연재를 시작했다.

“만화에 등장하는 심리학·혐오·테러 등은
모두 소재입니다.
‘자기 이해’를 위해 선택한 거죠.”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준다면

작가가 <닥터 프로스트>로 전하는 이야기는 명확하다. ‘자기 이해.’ “만화에 등장하는 심리학·혐오·테러 등은 모두 소재입니다. ‘자기 이해’를 위해 선택한 거죠. 저는 독자가 만화를 다 봤을 때 무언가를 체험하면 좋을지 정리하는데요. 결말과 엔딩 컷을 정하면, 반대로 그 무언가를 가지지 못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요. <닥터 프로스트> 같은 경우 ‘자기 이해’가 중요하니까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닥터 프로스트>의 주인공 백남봉(프로스트) 심리학 교수는 아주 어릴 적 기억이 없다. 어떤 사건을 겪었는지 아직 모르지만, 다른 사람보다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부족한 채 살아왔다.
<닥터 프로스트> 시즌 1·2는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심리학 교수 프로스트가 오직 논리만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의 감춰진 마음을 파헤치는 이야기이며, 시즌 3은 프로스트가 분명 가지고 있지만 내면 깊숙이 숨은 감정을 들여다보는 과정을 다루고, 시즌 4는 사람들에게 두려움·분노·혐오를 퍼뜨리는 한 남자를 막기 위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모든 이야기는 주인공 프로스트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프로스트는 시즌 1·2에서 타인 한명 한명을 마주하고, 시즌 3에서 자신의 숨어 있던 자아와 맞닥뜨리고, 시즌 4에서 사회로 나아간다. 한 사람의 인생살이가 흐른다. 이야기가 흐르면 흐를수록 프로스트 내면에 숨어 있던 애정·슬픔·분노·기쁨과 같은 감정이 조금씩 드러난다. 무표정하던 프로스트가 처음으로 미소 짓고, 눈물 흘릴 때 독자는 작가가 의도한 대로 ‘무언가’를 체험하게 된다. 이야기는 현재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만화를 그리기 위해 만화를 많이 보게 되잖아요. 어릴 때, ‘이 만화는 뭐길래, 날 울리지?’ 제가 정말 좋아하는데 이유가 뭘까 궁금했어요. 나한테 무언가 말을 걸고 있구나. 공통점을 막연하게나마 찾은 것 같아요. ‘말을 건다.’ 저는 초등학교를 다섯 군데나 다녀서 단짝 친구가 없었어요. 혼자 있는 시간에 만화를 봤는데, 주인공과 친구가 서로를 위해서 싸워주잖아요. 그게 좋은 거예요. 내게는 이런 친구 관계가 없구나. 제게 부족한 점을 만화가 깨닫게 해줬죠.” 그래서 작가는 트위터·뉴스·팟캐스트·강연 등 만화 외적으로 여러 자리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들으려 노력한다. 독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프로스트 교수가 내담자와 상담하듯 독자와 마주 앉아 진솔한 대화를 나눈다.
글 장영수_객원 기자 / 사진 제공 이종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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