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종이처럼 무채색에 가까운 분위기에 무대에서 보여주는 존재감과 흡인력이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젊은 여배우가
끌어가는 무대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지금 한국 연극계에서
그는 단연 빛나는 존재다. <환도열차>와 <햇빛샤워>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지난해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기도 했다.
공연을 앞두고 만난 그는 여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조곤조곤한 말솜씨로 할 말 다하는 똑 부러진 여자였다. 그의 연기에
반한 건 1950년대를 뚫고 나온 듯 너무도 옛날사람 같은 지순의 모습이었지만, 실제 그의 모습은 ‘생명력 넘치는 뜨거운 여자’ 광자에 더 가까워 보였다.
달동네 연탄집 양아들인 순수한 청년 동교네 집 반지하에 세 들어 살고 있는 백화점 판매직원 광자는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닳고 닳은 여자다. 어두운 과거를 털어내고 새 인생을 살기 위해 이름을 바꾸려 하지만 전과가 있어 쉽지 않다. 동교는 동네 사람들에게 연탄을 무료로 나눠주며 따뜻한 세상을 꿈꾸지만 광자는
그런 동교를 비웃는다. 하지만 동교가 부조리한 세상에 좌절해 끝내 삶을 등지자, 광자는 갑자기 싱크홀에 빠진 듯한 무력감에 몸부림친다.
연극 <햇빛샤워>는 2015년 남산예술센터와 극단 이와삼이 공동제작한 창작극으로, 지난해 차범석희곡상을 비롯해 김상열연극상, 올해의 공연 베스트 7, 동아연극상 등 주요
연극상을 휩쓴 작품. 요즘 연극계에서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통하는 장우재 연출이 험난한 자본주의 사회를 버텨내고있는 가난한 자들의 삶의 모습을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영화적인 미장센으로 무덤덤하게 그려내 충격을 줬다. <환도열차> 등에서 ‘장우재의 페르소나’로 인정받은 김정민은 자신이 연기한 광자를 두고 “너무 뜨거워서 탈”이라고 했다.
어두운 내면을 가진 캐릭터에 몰입이 잘되던가요.
제가 그렇게 어둡게 살아오지 않아서요. 그 깊은 어두움에 사실 몰입하기가 힘들기는 했죠. 하지만 그 부분이 제일 중요하거든요. 초연 때 좀 헐거웠던 것 같아서 아직도 숙제예요. 하지만 광자의 욱하는 성질은 연출님이 저한테 영감을 얻었다고 하시거든요. 제게도 있는 그런 성향이 어떤 어두움과 만나서 이렇게 표출되는 것 같아요.
“광자는 쌍년”이란 게 키워드인데요.
연출님이 평소에 “대학로 쌍년 정신”이란 말을 써요. 단어 자체는 욕이지만 연출님은 좋은 의미로 쓰시죠. 연극판에서 수 동적이지 않고 자기주장도 펼치면서 주위도 아우를 줄 아는 여성 작업자들에게 좋은 의미로 붙인 말인데 그걸 광자에게도 대입시킨 거죠. 저는 오히려 그 뉘앙스를 알아서 힘들었어요. 광자 연기를 하려면 좀 돌아버려야 되는데, 좋은 뜻인 줄 아니까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광자는 이름을 바꾸려고 몸까지 파는데, 대체 뭘 얻고 싶었던 걸까요.
작품 전사(前史)이긴 하지만 이름 때문에 고생을 너무 많이 하고 살았으니까요. 이름만 바꾸면 더 이상 고생을 안 할 것 같다는 막연한 믿음 때문에 이유 불문하고 바꾸려는 것 아닐까요. 지금의 삶에서 단지 벗어나고 싶은 절실한 기대감 때문인 것 같아요.
본인 이름도 배우로서는 평범한데, 바꾸고 싶지 않나요.
한번 생각은 해봤어요. 그런데 제가 그래봤자 ‘정 민’ 정도로 바꿀 것 같은 거예요. 그렇게 바꾼다고 대단한 컬러가 생길 것 같지도 않고, 저는 평범한 사람이고 평범한 이름이 어울리는 것 같아요. 제가 누가 척 봐도 알 만큼 개성이 확 드러나지 않잖아요. 오래 봐야 제 느낌이나 매력을 알아주는 느낌이에요. 사람마다 컬러가 다르니까, 난 이런 컬런가 보다 하고 살아요.
쿨한 척 살다 동교 죽음에 갑자기 폭발하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사실 대본에 적시되지 않은 당위성이라 제일 어려워요. 하지만 작업에서는 그걸 해내고 관객에게 이해받는 게 숙제죠. 저한테는 이유가 있어요. 치열하게 살아오면서도 아무 조건없이 다가와준 유일한 사람인 동교에게 길 잃고 비 맞은 고양이 같은 동질감이 있었는데, 그게 갑자기 사라진 상실감이 너무 컸던 것 아닐까요. 동교와 광자가 교감하는 부분에서 둘의 관계와 사건의 당위성까지 전달해야 하는데, 지금도 고민하는 지점이긴 해요.
그는 <햇빛샤워>를 두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드러나면서 관객과 만나는 공연”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작품이 공연의 당위성을 만들고 연출로 드러내는 데 반해 <햇빛샤워>는 “대본에도, 연출로도 설명할 수 없지만 다들 공감대를 이루게 되는 기운이나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그건 결국 “배우들의 몫”이다.
<환도열차>의 지순과 광자는 정반대의 캐릭터인데, 단기간에 연이어 소화하기가 어떤가요.
지순 역으로 만들어놓은 게 너무 강해서 여운이 깨끗이 사라지진 않아요. 연습 초기엔 “너, 조용히 얘기할 때 스멀스멀 나온다”고 지적도 받았죠.(웃음) 오히려 너무 반대라 편한 것 같아요. 지순을 연기할 때는 평소에도 늘 조용히 있어야 몰입이 돼서 힘들었는데, 광자는 어중간하게 가는 게 아니라 그걸 확 날려버릴 수 있는 역할이라 더 재밌기도 하죠.
예술의전당 제작으로 2014년 초연한 <환도열차>는 6?25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 갔다 휴전 후 남편을 찾아 서울행 기차를 탄 새댁 지순이 현대로 타임슬립해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를 목도하는 이야기다. 지순의 서울 사투리를 구사하기위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의 옥희를 참조했다지만, 김정민은 대사 구현을 넘어 ‘진짜 옛날 사람’으로 보이는 대체 불가능한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사투리 때문에 옛날 사람으로 보인 것 같지는 않던데, 어떤 노력이 필요했나요.
단순히 대사 처리만으로는 감당이 안 됐어요. 피난민들 다큐멘터리나 당시 외국 기자들이 찍은 영상 등 6?25전쟁 자료를 엄청 봤죠. 정말 그 당시 분위기에서 탁 튀어나온 것 같은 정서가 없으면 연기가 안 되니까요. 봇짐 들고 피난 가고 꿀꿀이죽 먹는 옛날 정서에 집중하면서 그 말투를 만들었어요. 제가 확신 갖고 하니까 아무도 의심 안 하더라고요. 하지만 굉장히 외로운 작업이었어요. 대기 중에도 계속 혼자서 사진과 영상 보면서 집중하다가 무대에 들어가야 했거든요.
현대 여성인 광자 연기는 한결 편하겠어요.
장우재 연출 작품에 연기하기 쉬운 건 없어요. 광자 경우는 인물이 가진 두께 자체를 표현해내기가 어렵죠. 내면의 어둠에 관한 건데, 물론 저도 슬픈 일, 아픈 일도 겪어봤지만 작품이 품은 어둠을 넘어서는 게 숙제거든요. 개인의 아픔을 꺼내기보다 작품의 어둠을 타야 하는 거죠. 장 연출 작품은 항상 그래요. 배우가 그쪽으로 크게 열지 않으면 뭔가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는 어려운 작업이죠.
그는 2010년 서울시극단 <7인의 기억>으로 장우재 연출을 만나 그가 이끄는 극단 ‘이와삼’에 들어간 이후 5년 동안 그의 모든 작품에 함께했다. 처음에 주인공 추천을 받았다가 단역으로 캐스팅된 아픔이 있지만, 조금씩 자신의 장점을 발견하고 다양한 기회를 준 장 연출 덕에 자신이 가진 면모를 보여줄 수 있었다고. 하지만 최근 자유 활동을 선언했다. 주역을 보장받은 온실 같은 극단을 벗어나 더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할 시점이란 생각에서다.
현대극에서 젊은 여자가 주인공인 무대가 별로 없잖아요.
저는 무조건 감사해요. <환도열차> 끝나고 바로 하는 것도 물리적으로 힘들지만 여배우로서 너무 감사한 일이죠. 젊은 걸 떠나 여배우 자체가 전면에 나서서 이야기하는 게 많지 않다는 걸 저도 아니까요. 연출님이 저를 위해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만난 것 같아요. 이야기하고 싶은 것과 사람이 딱 만나서 그렇게 된 건데, 결론은 배우로서 너무 감사한 거죠.
장 연출은 요즘 가장 뜨는 이야기꾼인데, 그의 작품의 매력은 뭘까요.
그가 하는 이야기는 배우에게 자부심을 줘요. 이런 이야기를 지금 누군가 꺼낸다는 것, 이런 작품에 내가 선다는 것 자체가 자부심이죠. ‘칼 들었다’고 하는데, 예리하게 사회 현실을 드러내는, 냉철하고 지적이면서 칼날 같은 느낌이 너무 좋아요. 그런 면에서 작품이 섹시하죠. 연기하기엔 힘들지만 작품만 보면 정말 좋거든요. 개인적으로 장우재 작가의 팬이에요. 신작 나올 때마다 기대되고 설레는 팬이라서 극단에도 들어가게 된 거죠.
그간 외부 활동을 거의 안 했는데요.
처음 들어갈 때 극단 작품에 집중한다는 약속을 했거든요. 올해 초 <고제>부터 외부 활동을 시작했어요. 투쟁했죠. 나 좀 놔달라고.(웃음) 극단에 있으면 어떻게든 작품은 주어질테지만, 여기만 머물면 유연하지 못한 배우가 될 수 있겠다는 걱정이 들었어요. 극단에선 행복하고 기회도 주지만, 낯선 환경에도 있어봐야 할 것 같아요.
더 큰 무대가 욕심나는 건가요.
저는 충분히 큰 무대에 섰다고 생각해요. 더 큰 무대에 서면 물론 좋겠죠. 하지만 오히려 야전으로 나가겠다는 마음이에요. 자유롭게 작품을 선택하고, 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만나보고 싶은 거죠. 보기 좋은 무대에 서기보다는 아직 경험을 많이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에요.
- 글 유주현
- 중앙SUNDAY 공연담당 기자. 서울대학교 미학과, 동 대학 국제대학원 일본지역전공 졸업. ‘근현대 일본사회의 소녀문화 현상에 관한 연구: 다카라즈카 가극을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 사진 김창제
- 공연 사진 서울문화재단, 예술의전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