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WCCF 2015 서밋 마지막 날 폐막식이 진행된 런던시청 옥상돔 바로 건너편에 있는 런던타워에 쌍무지개가 걸렸다.
“Use it, or Lose it.”
세계도시 문화정책이 직면한 공통의 문제 상황
세계도시문화포럼(World Cities Culture Forum: WCCF) 서밋은 각 도시의 문화정책을 담당하는 실무 전문가들의 네크워크인만큼 매우 현실적인 정책 과제들을 주제로 다룬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문화와 관련된 문제적 현상들이 매우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는 것은 정보화, 세계화, 신자유주의의 거센 파도를 고려한다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Use it or Lose it’이라는 주제로 진행된 서밋 1일차 주제 세션에서 런던이 던진 핵심 질문은 ‘세계 도시들은 스스로 성장의 제물이 될 것인가? 혁신과 창의성을 몰아내지 않고 도시 성장의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였다. 그것은 바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서울의 문제이기도 하다.
런던시장실 문화정책 그룹의 책임자로서 WCCF의 의장직을 맡고 있는 저스틴 시몬스(Justine Simons)는 공공미술이 사유지의 지가만 올리는 현상, 비틀스와 롤링스톤스 같은 음악가들의 활동무대였던 작은 바와 클럽들이 최근 35%나 소실되고 있는 문제**, 문화관광(cultural tourism) 전략으로 관광산업의 성장은 이루었으나 런던의 정신은 잃어버릴 위기(growth or soul) 등을 실토했다. 창조산업의 중심으로 자부해온 런던이 도시 브랜딩으로 프로모션된 런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동안, 실제 런던은 잃어가고 있고(Brand London vs. Real London), 런던의 문화는 위험에 처해 있다고, 런던 시의 최고 문화정책 담당자로서 갖는 우려를 솔직히 표명했다. 그리고 그녀는 런던 시가 문화를 그냥 주어지는, 당연한 것(take it for granted)으로 치부하는 것이 문제의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금포용적인 성장전략에 필요한 핵심 요소들을 찾아서
2 WCCF는 매년 서밋에 맞추어 WCCR을 발간한다. 서밋 1일차 Shard 타워에서 열린만찬에서 WCCR 2015를 소개하는 런던 문화담당 부시장.
3 서밋은 런던시청 돔에서 파리 테러 희생자에 대한 묵념으로 시작되었다.
WCCF는 리더십(leadership), 객관적 증거(evidence), 국제협력(global collaboration), 상호 자극과 영감(inspiration)을 중요가치로 공유한다. 현장 업무를 통해 다져온 문제의식을 전 세계의 다양한 실제 사례를 통해 공유하며 답을 찾아간다. 2014년 서밋은 ‘도시의 성공을 지속할 수 있는 전략(strategies for sustaining success)’으로서 문화라는 만능 열쇠를, 조금은 자랑스럽게 제시하는 자리였다. 반면 2015년에는 세계도시문화보고서(World Cities Culture Report: WCCR 2015)에서도 명시했듯이, ‘성장이라고 다 좋은 것일까?(Is all growth good?)’ 라고 좀 더 냉정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그동안 상찬해온 문화를 통한 성장전략을 보다 심화하면서도, 성장의 대가에 대한 반성을 포함해 ‘지속 가능하면서도 포용적인 성장(sustainable and inclusive growth)’을 위한 전략을 찾아 한발 더 나아가고자 했다.
템스 강가에 유리돔 형태로 자리 잡은 런던 시청에서, 파리테러에 대한 묵념과 런던시청 문화담당 부시장의 환영사로 서밋이 시작됐다. 제1주제 세션 ‘Use it or Lose it’의 주제 강연자로 나선 다이앤 코일(Daine Coyle, <The Weightless World>의 저자)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이끌어내는 사람들 간의 교류, 그런 교류의 중심점으로서 소프트 인프라가 더 중요한 시대인데, 지금은 공공 공간(public space)조차 사유화되면서 그런 교류 활동이 위험에 처했다고 진단했다. 공공정책이 공짜 표로 문화예술에 대한 접근성을 높인다지만 시민이 와서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이 든다면 소용없는 일이며, 모든 시민이 그냥 부담 없이 어우러질 수 있는 공공 공간(public space to mingle)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각 도시의 문제 상황을 분과별로 나누어 발표하고 좀 더 긴밀하게 의견을 교환하는 ‘Expo’는 2015년 새로 도입되었는데, 템스강 건너편에 있는 런던타워에서 열띠게 진행됐다. 그중 폴란드 바르샤바 시의 고민이 바로 민주혁명 도시의 역사에 걸맞은 ‘시민참여형 문화정책 결정구조 만들기’였다.
반면, 상하이의 고민은 ‘민간 및 영리 문화예술 활동을 공공영역 문화 활동 확대에 기여하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아직까지 미약한 공공 부문의 문화정책 역량에 비해, 자본주의 물결 속에서 급격히 성장하는 민간, 영리 영역의 문화예술 활동에 대한 고민이 짙게 묻어나는 발표였다.
4 3일차 폐막 세션에서 런던의 문화적 자부심을 피력하고 있는 보리스존스 런던시장.
5 서밋 3일차 사우스워크성당에서 진행된 분과별 회의 중 Finance Report 라운드테이블.
[ 핵심요소 1 ] 연계하기(engagement)
시민사회, 영리 영역과 폭넓게, 맥락에 맞게
서밋 2일차에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파크의 상징 조형 건물인 ArcelorMittal Orbit 타워에서 진행된 제2주제 세션 ‘Can we built it and who is it for?’에서,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A)의 관장인 마틴 로스(Martin Roth)도 ‘지역사회와 섞이기(mix with society)’를, 새들러스 웰스(Sadler’s Wells) 극장 대표이사인 앨리스테어 스팰딩(Alistair Spalding)도 ‘지역사회로 일방적으로 투입되지 않기(not parachuting onto community)’를 강조했다. 왕실 재산을 운영하는 전자의 경우는 사회적 책임의식으로 들리고, 예술단체로서 드물게 티켓 수입으로 자립하고 있는 후자의 경우는 시장 또는 사회 안에서 살아남기 위한 실존 전략으로 들리는 차이점이 흥미로웠다.
이처럼 정부 공공정책에 대한 민간 영역과의 더 많은 연계(engagement)는 공익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영리적 또는 재정적 측면의 성공 차원에서도 요구된다. 앨리스테어 스팰딩은 더 많은 관객뿐만 아니라 더 다양한 관객과 만나라는 요구에 대응하는 경영전략이 적절히 균형을 유지하며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젠트리피케이션의 긍정적인 측면도 강조했다.
하지만 시민사회, 민간 영리 영역과 공공 문화정책을 연결지으려는 우리는, 위와 같이 세계 도시들이 모두 지향하는 주민참여, 민관 협력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의제가 아니라, 바르샤바·상하이·런던의 정치·경제·사회구조와 문화예술 생태계가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 핵심요소 2 ] 증거 만들기(evidence)
전략을 위한 복잡한 숫자도 중요하다
행사 3일차에는 템스 강가의 유서 깊은 사우스워크 성당에서 3개 분과 토의가 진행됐다. 필자는 ‘문화 재정 분석(Financing models for culture)’에서 WCCF에서 공동 연구로 추진 중인 ‘World Cities Culture Finance Report’와 관련한 쟁점들을 발표했다. 문화 통계 중 정부기관에서 가장 간단하게 조사할 수 있을 것 같은 문화 예산 통계를 만드는 것조차 정의와 범위, 데이터 형태의 통일 등 난제로 인해 표준화해 정량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도시 간 순위를 매기는 것은 더더욱 부적절하다는 요지였다.
WCCF에서는 ‘공고한 증거 자료 없이 강한 정책 주장은 불가능하다: Without hard evidence we can’t make hard argument’는 신념으로 매년 서밋에 맞추어 WCCR을 발간한다. WCCR은 전 세계 주요 도시들의 문화정책 관련 주요 지표들을 서로 비교해 볼 수 있는, 사무국에서 자랑하는 것처럼, 거의 유일한 보고서로서 매우 의의가 크다. 하지만 문화정책의 발전을 위해 공고한 증거(hard evidence)로 소환될 숫자에 대해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열망을 가져야 한다. 주로 차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공무원들의 정책목표 설정에 사용되는, 개략적인 총량을 나타내는 심플한 지표도 필요하지만, 그런 정책 목표 달성을 위한 전략 수립을 위해, 문화생태계의 내부 구조를 이해할 수 있는 좀 더 복잡한 실태조사 숫자가 더 중요하다. WCCR 2015에서도 이전 해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은 정량적 지표 분석에만 그치지 않고, 도시별 오피니언 리더 총 150명의 의견을 종합해, 현재 세계적으로 직면한 문화정책 어젠다를 추출해내고 있다. 다만 매우 우려되는 점은, 갈수록 편집과 인포그래픽 기법은 발전해 도시 간 순위 비교만을 원하는 사람에게도 매우 가독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6 세계도시문화포럼(WCCF) 2015년 서밋은 고풍스러운 런던타워와 초현대적 마천루가 공존하는 템스 강가의 런던시청에서 3일간(2015.11.17~20) 진행되었다.
[ 핵심요소 3 ] 리더십(leadership)
성찰적이고, 학습하고, 협력하는 행정가
이번 서밋 전반을 관통하는 문제들에 대해 토의한 1일차 제 1세션 말미에, 진행을 맡은 폴 오웬스(Paul Owens, WCCF 사무국을 운영하는 BOP 컨설팅의 대표)가 발제자들에게 지금까지 언급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한 가지씩만 얘기하라고 했다. 예술의 사회적 효과를 중심으로 발표한 뉴욕의 에드윈 토레스(Edwin Torres, 뉴욕시청)는 ‘다양한 의견 청취: Listening’를, 런던이 직면한 문제를 나열한 저스틴 시몬스는 ‘리더십’을 꼽았다.
서밋 마지막 날 폐회식에서 영화 ‘007 시리즈’ 이야기로 좌중을 웃기며 창조도시 런던을 한껏 자랑하는 보리스 존슨 런던시장의 영국식 유머를 다 이해하기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런던이 당면한 문화정책 이슈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런던시청이 취하고 있는 일련의 조치들을 설명하는 저스틴 시몬스의 의지와 논지는 명확했다. 어찌 들으면 10여 년 동안 런던 시 문화정책의 최고 책임자로서 활동해온 그녀의 문제 지적은 소위 ‘유체이탈 화법’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의장을 맡고 있는 WCCF의 기본 운영 철학, 그녀의 이력, 런던시청의 문화정책 구조를 이해하면, 문화정책의 진일보를 갈망하는 서울시가 수입해야 할 것이 벤치마킹할 사업 정보가 아니라 바로 이런 ‘행정문화’임을 알게 된다.
런던시장실에서 일하기 전에 10여 년간 현대무용계에서 활동한 저스틴 시몬스는, 소위 개방직 공무원이다. WCCF 사무국 역할을 담당하는 BOP는 민간 컨설팅 회사로서 런던시청과 독특한 장기 파트너십 계약을 맺고 있다. WCCF 서밋은 초청 강연자 이외에는 기본적으로 외부 인사가 참여하지 않고 철저히 회원도시 참가자들 간의 긴밀한 토론으로 진행된다. 이는 유사한 고민을 공유하는 당사자들끼리, 실패 사례조차 오프 더 레코드 방식으로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중시하는 운영 원칙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 안에서 참가자들 스스로의 실패도 반성하며 학습을 통해 성장하는, 소위 ‘성찰적인 학습자’ 모드로 이끌 수 있다. 발표와 토론 세션뿐만 아니라,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 밥 먹는 시간 모두 소중한 깨달음의 시간이 된다. 지자체 단체장들의 (지나치게) 강력한 리더십보다는, 문화행정을 담당하는 인사들의 이런 리더십이 바로 우리나라 문화정책 발전에 필요한 요소가 아닌가 절실히 느낀 시간이었다.
* (도시명 알파벳 순)암스테르담, 오스틴, 보고타, 브뤼셀, 부에노스아이레스, 두바이, 에든버러, 함부르크, 홍콩, 이스탄불, 런던, 로스앤젤레스, 마드리드, 멜버른, 몬트리올, 모스크바, 뉴욕, 파리, 리우, 로마, 샌프란시스코, 서울, 상하이, 선전, 싱가포르, 스톡홀름, 시드니, 타이베이, 도쿄, 토론토, 빈, 바르샤바
** 런던시청은 이런 문제에 대응해 2015년 10월에 ‘London’s grassroots music venues rescue plan’을 수립했다.
- 글 김해보
- 서울문화재단 정책연구팀장
- 사진제공 런던시청 WCCF 사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