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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샌드아티스트 김하준 모래와 빛, 손짓으로 건네는 이야기
샌드애니메이션은 라이트박스 위에서 모래로 그림을 그려가며 이야기를 전하는 작업이다.
모래 입자는 거칠지만 빛과 만나는 순간 따뜻하고 부드러운 질감, 은은한 여운을 만들어내는 재료다.
샌드아티스트 김하준은 인생에서 가장 힘든 때에 모래를 만나 이야기를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삶, 그림에 대한 절박함과 진솔함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손짓과 이야기에 주목하게 했다.

샌드아티스트 김하준

모래에 생명을, 빛으로 이야기를

샌드애니메니션(sand animation)은 ‘sand’와 ‘animation’의 합성어로, animation의 어원인 라틴어 ‘ANIMA’에는 ‘생명을 만들다 또는 불어넣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샌드애니메이션’이라는 단어는 ‘모래로 생명을 만들다’는 뜻을 가진 셈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샌드애니메이션은 생소한 장르였지만, 지금은 ‘모래로 그림 그리는 것’이라는 정도로 많이 알려진 듯하다.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다.
나는 어릴 적 유독 무언가를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칭찬의 대부분도 그림에 대한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칭찬을 받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칭찬(박수)을 받는 게 좋아 창작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칭찬을 이어가기에 내가 마주한 현실은 참 가혹했다. 그림 그리는 것을 매우 좋아해서 서양화, 동양화, 애니메이션, 만화, 일러스트, 조각 등 모든 장르를 섭렵하고 싶었지만, 가난은 모든 꿈을 사그라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작가가 새로운 작업을 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충분한 상상력, 창작의지다. 그러나 그보다 항상 먼저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 ‘재료를 구비할 수 있느냐’다.
대학 시절 모든 한계에 부딪혔다고 생각하던 무렵, 비 오는 거리에서 우연히 모래를 만났다. 한 건물의 공사가 끝나고 그 옆에 버려진 한더미의 모래에서 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건물의 일부로 쓰이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온 모래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빗물에 쓸려가는 모습이 무기력한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 모래를 한 움큼 쥐고 생각했다. 여기에 생명을 불어넣어보겠다고. 삶에 대한 미련이 몸부림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보편적인 이야기로 관객과 교감하는 것

샌드애니메이션은 빛과 모래, 손짓으로 이루어지는 퍼포먼스다. 라이트박스 위에 모래로 그림을 그리면 빛이 투과되는 부분은 흰 배경이 되고 빛이 투과되지 못하는 모래 부분은 그림자가 되는데 흡사 먹(물)처럼 흔적을 남긴다. 보통 라이브 드로잉으로 이루어지는 넌버벌 퍼포먼스이기 때문에 제한된 시간 안에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최대한 이끌어 내기 위해 두 가지 기법을 사용한다. 그림을 그리는 모든 과정이 작품에 포함되므로 빠른 속도와 특징을 순간적으로 부각하는 크로키 방식이 하나고, 또 다른 기법은 신(scene)과 신을 연결해주는 몰핑 기법이다.
몰핑 기법은 한 개체에서 다른 개체로 변화하기도 하며 장소의 이동과 시간의 흐름, 전환을 알리기도 한다. 몰핑 기법은 그림과 그림을 이어줌으로써 공연의 시간 효율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함이다. 이 기법은 관객의 흥미를 유발하는 가장 큰 요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와 관객의 교감이라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릴 때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을 사용하며 색은 최소한으로, 대사가 없는 영상언어로만 이루어지기에, 샌드애니메이션은 국제적 장벽이 없는 가장 원초적인 공연 중 하나일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 각박한 삶에 지친 관객에게 자극적이지 않은 편안함을 주는 듯하다.
공연하기 전에 깊이 고민하는 부분은 시나리오다. 물론 공연 현장 분위기에 따라 순간적으로 시나리오를 바꿔서 진행할 때도 있다. 관객의 시간은 중요하다. 그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주지 못한다면 자신에 대한 질책을 골백번도 더 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공연 전까지 주어진 시간 동안 시나리오를 골백번 더 고민해야 한다. 지금까지 수천 회 공연하면서 그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작품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뿐이라고 생각해왔다. 앞으로도 그 기대감과 두려움은 공존할 듯하다.
공연가로서 가장 큰 변화를 느끼는 시기는 공연이 끝나고 관객의 박수 소리가 날 때다. 갈채가 이어질 때는 관객들이 가장 진실할 때고 그 순간에 나에 대한 반성과 보람 등 만감이 교차한다. 그때의 기억이 다음 공연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결국 공연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관객이다.

샌드아티스트 김하준공연 중인 김하준 작가.

샌드아티스트 김하준김하준 작가의 ‘힐링톡 마음을 그리다’ 중에서.

관객과 자주 만나고 가슴에 오래 남을 수 있는 예술

몇 년 전 상업예술로 발전시키기 위해 샌드애니메이션 콘서트를 기획해 수차례 성공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국내에서 개인이 기획한 티케팅 공연이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이 정설에 가까웠는데 오히려 무모하기 때문에 패기로 성공하게 된 것 같다. 공연을 기획하고 장소를 대관하고 컬래버레이션할 수 있는 공연팀을 모으고 관리하고 재무관리를 책임지고…. 많은 일을 혼자 모두 소화하려다보니 에너지를 너무 많이 소진했는지 한동안 창작을 할 수가 없었다. 기획공연을 하는 즐거움도 컸지만 역시 시나리오를 쓰고 그림을 그리며 공연을 만드는 데 스스로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은 영상작업을 하고 밖에 나와보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찾아간 병원에서는 더 이상 라이트박스를 보는 것은 무리라고, 적어도 몇 개월간은 빛을 멀리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을 듣게 되었다. 하지만 잡혀있는 일정을 취소할 수가 없어 평소에는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공연할 때만 선글라스를 벗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는 연습도 할 수가 없어 이미지 트레이닝을 본격화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많이 단련돼 예전만큼의 연습 없이도 새로운 시나리오의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는 다시 공연을 기획하고 있기 때문에 준비가 되면 좋은 시나리오를 가지고 관객에게 다가갈 예정이다.
앞으로 좋은 작가가 더 많이 생겨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개인의 능력은 한계가 있지만 그 개인들이 하나로 뭉치면 엄청난 시너지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생각과 환경이 다르기에 수많은 이야기가 다양한 샌드애니메이션 작품으로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수없이 많고 또 시나리오를 잘 쓰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그림과 시나리오를 함께 잘하고 그것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에, 이 두 가지에 대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관객은 당신을 찾아오게 될 것이다.문화+서울

샌드아티스트가 되려면?
1드로잉 실력은 필수, 이야기꾼의 자질도 중요 시각예술이므로 기본적인 드로잉 실력을 갖추어야 하고, 시나리오 쓰기를 좋아하면 금상첨화다. 관객과의 소통에 능숙하고 많은 시나리오를 갖고 있다면 분명 좋은 작가가 될 것이다.
2타인의 이야기에 귀 열고 배려하는 열린 마음 본인이 하고 싶은 것만 고집하기보다는 관객이 있고 작가가 있다는 생각으로 배려하면 여러 형태의 좋은 작품이 나오리라 생각한다.
글 김하준
국내 1호 샌드아티스트, 홍익대학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샌드애니메이션 분야에서 꾸준히 활동해 연간 200회 이상의 공연을 선보이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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